괴롭힘의 패턴들

by 나침반


저학년 시기의 괴롭힘과 고학년에 접어든 뒤의 괴롭힘은 분명히 결이 달랐다.

어릴 때는 새치기나 속이기, 물건을 빼앗는 식의 행동이 많았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어른에게 설명하기도 비교적 쉬운 장면들이었다.

학년이 올라가자 방식이 달라졌다.

말투에 묻어나는 비아냥,

농담처럼 던져지는 조롱,

특정 아이를 은근히 제외한 채 흘러가는 분위기,

뒤에서만 공유되는 이야기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교실이지만,

관계 안에서는 분명한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반복해서 마주친 장면이 있다.

가해로 지목된 아이는

“그런 적 없다”고 말하거나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며 회피한다.

혹은 내 아이가 먼저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에 반응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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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아이는 그럴 리 없다”는 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는 확신,

혹은 흐린눈을 하며 대충 넘어가려는 태도.

아이와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이나 사과를 들은 적은 없었다.

이 구조 안에서 조용한 아이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자리에 놓인다.

크게 항의하지 않고, 억울함을 즉각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상황을 정리해 말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누가 잘못했는지,

어디까지가 문제인지가 모호해진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을 겪어도 선생님이나 학교가

그 상황을 끝까지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인식이 쌓인다.

그 불신은 불안으로 이어지고, 불안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왔다.

결국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는 상태만이

완전히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처럼.

이 일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에 띄는 신체적 폭력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부모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하면 ‘극성 학부모’나 ‘문제 많은 보호자’라는 시선이 따라붙는다.

실제로 배려라는 명목 아래 내 아이에게만 조금 더 관대했던 대응이

오히려 반 안에서의 질투를 키운 적도 있었다.

또 다른 현실적인 한계도 있다.

가해 학생이 “그런 적 없다”고 부인하면,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담임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 증거를 모으는 일은 결국 피해를 입은 아이의 몫이 된다.

아이에게는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을

어떤 아이의 성격이나 예민함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느낀다.

비가시적인 방식의 괴롭힘, 부인과 방관으로 유지되는 구조,

그리고 상처받으며 버티는 아이들.

혹시 이 글을 읽으며

“우리 집 이야기 같다”고 느끼는 보호자가 있다면,

그 감각을 너무 빨리 부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설명하기 어려워서, 증명할 수 없어서,

괜히 일을 키우는 것 같아서 혼자 삼켜왔던 마음들이 있다면,

그건 과한 걱정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오래 고민해 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래 고민한 끝에

결국 남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아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 수 있는 건

부모가 만들어 주는 단단하고 따뜻한 자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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