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라면과 와사비

일상에서 마주하는 한일 관계의 한 단면

by 이루카

혼자 들어간 가게에서 주문한 라면이 나왔을 때, 나는 마침 왼 손에 쥔 핸드폰으로 '한국인 관광객을 향한 와사비 테러'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있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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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해 양국의 관광을 위한 왕래가 완전히 차단되기 한참 전, 그러니까 최소한 5년쯤 전에 읽었던 기사와 거의 유사한 내용의 기사였다. 일본 관광 중에 주문한 스시 안에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와사비가 들어있었다, 딘순한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한국인을 향한 일종의 '테러'라고 확신했다, 라는 한국인 관광객의 인터뷰에 이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가게 측은 부인한다는 설명이 덧붙여지는... 잠깐 내가 옛날 기사를 다시 읽고 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수년 전과 똑같은 내용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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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도 꽤 오랫동안 일본의 '와사비'를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도쿄 시부야 어느 골목에는 30분 동안 7접시 이상을 먹는 조건으로 접시당 100엔을 받는 매우 저렴한 회전 초밥집이 있었고, 그 앞은 항상 한국인 관광객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와사비 더 주세요' 각 초밥 안에 이미 와사비가 들어있는데도,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와사비를 더 달라며 쉐프에게 접시를 내미는 것은 흔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와사비 더 필요하시죠?'라며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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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음식점에서 나오는 와사비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유학 초기 회식 자리에서 짧은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앞 자리에 앉은 일본인 교수에게 들은 말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와사비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동감했다. 연두색 물감같이 보이기도 하는 그 희귀한 액체를 한국의 고급 횟집에서 와사비라는 이름으로 내놓던 시절, 그와는 다른 일본의 와사비의 식감과 맛에 살짝 중독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일본의 맛'이랄까, '어른의 맛'이랄까. 뭐 그런 약간의 우월감 어린 착각을 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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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의 일본인들이 의외로 와사비에 시큰둥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라기보다, 와사비가 오히려 스시나 사시미 심지어는 간장의 맛(풍미)조차 가린다는 이유를 드는 경우가 많았다. 나아가 '일본의 와사비'조차 실은 진짜 와사비가 아니라 그 맛을 흉내낸 것이라는 것, 줄기를 갈아낸 진짜 와사비를 맛보려면 고급 스시점의 그 어떤 생선보다도 무게 대비 가장 높은 단가의 가격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나 역시도 이전만큼 와사비를 즐기지는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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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도야마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호텔로 돌아온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야마 안내 책자를 뒤적였다. 혼자서 지방 여행을 할 때에는 아무래도 분위기나 맛이 좋은 가게를 고집할 수 없고, 대개는 시간에 쫓겨 가볍게 허기를 채우는 경우가 많기에, 모처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스토리'라도 있는 가게를 찾게 된다. 도쿄 서점에서 샀던 도야마 관광 안내 책자를 뒤적이다가, 도야마에서 유명한 '블랙 라면'이라는 라면의 발상지(? 원조 맛집?)가 호텔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저녁은 여기다, 결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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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6시가 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인지, 가게는 한산했다. 나 외에 한두 커플이 더 보였다. 가장 위에 있는 시그니처 메뉴를 고르고, 공기밥을 추가했다. 그리고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이것저것 기사를 뒤적이던 참에, 주문한 라면이 도착한 것이었다. 첫 인상은 이제껏 먹어본 수많은 라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블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치고는, 오히려 국물 빛깔이 아주 검지는 않네'라고 잠깐 생각했던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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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젓가락을 입에 넣은 순간, 혀가 쩌르르했다. 정말 간장을 부은 듯한 맛이었다. 온 입안에 진한 간장의 맛이 확 배어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온종일 거리를 휘저은 후의 노곤한 몸에 피곤함으로 멈춘 뇌.... 상황이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나도 도쿄에서 짧쪼롬한 국물의 간토 라면은 먹을 만큼 먹어본 사람인데,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진하게 짠맛이었다. 이게 맞나? 일행이 있다면 서로 낄낄거리며 맛에 대한 풍평이라도 할 텐데, 하다 못해 지금 이 짠맛이 현실인지라도 확인이 될 텐데,,, 몽롱하여 판단이 안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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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것이야말로 간장 테러는 아닐까?' 이미 더 볼 일이 없기에 한쪽에 밀어두었던 메뉴판을 꺼내어, 맛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려 했다. '아주 짠 맛, 간장을 들이부은 그맛', 뭐 그런 설명이라도 있을까? 공기밥을 추가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라면 한 입에 밥 한술로 입을 헹구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나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일본인 남자 손님 앞에도 라면이 놓이는 것을, 그리고 한 젓가락을 입에 넣은 후의 그의 표정을 엿보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라면을 먹는 그를 보며, 내 라면과 그의 라면의 맛이 같은지, 혹 내 라면에만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은 아닌지, 그의 라면 국물을 가서 맛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념에 머리를 굴리다 보니 어느 샌가 나는 면과 공기밥을 전부 해치웠을 뿐 아니라, 국물마저 절반 이상 마신 상태였다. 짠맛도 중독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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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시절에 비해 뻔뻔해진 나는, 일본 여행중에 아무나 붙잡고 실없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라면집에서는 경직되어 그게 안 됐다. 농담처럼 '국물 맛이 생각보다 너무 짜서, 혹시 간장을 쏟으신 게 아닌가 했어요'라고 실없이 던져보기에는, 어쩌면 이들이 정말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일부러 (가끔 알바생이 맘에 안 드는 손님 커피에 침을 밷는다는 소문이 있는 것처럼)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 잠시 심경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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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을 마친후 어슬렁어슬렁 역내의 기념품 가게를 돌아보다가, 투명한 유리병에 '블랙 사이다'라는 이름이 붙은 검은 음료를 발견했다. 도야마 특산으로, 간장과 후추 풍미가 담겼다고 한다. 아직도 간장 맛으로 입안이 얼얼함에도, 무엇보다 열흘 가까운 일정이 남았기에 짐이 늘어나는 것은 극도로 자제해야 함에도, 굳이 마시지도 않을 이 기이한 탄산음료 한 병을 바구니에 담고야 말았는데,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한 짓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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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면을 처음 맛본 후, 꺄~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물을 더 달라고 하거나, 이런 맛의 라면이 있을 수 있다니...라며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잠깐 내가 한국의 국가대표가 된 느낌이었던 것일까? 만일 정말 한국인인 내게 일본인이 지금 간장 테러를 한 것이라면, 묵묵히 먹는 것, 먹고 나서 담담히 맛있다고 하는 것, 먹고 나서 이게 정말 맛있는 거냐고 묻는 것, 맛에 대해 농담을 시도하는 것 등등....가운데, 어떤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을지를 고민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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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외로 짠 라면, 상식 이상으로 많이 들어간 와사비를 앞에 놓고, 개인과 개인, 소비자와 판매자, 손님과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 설마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몸 안 깊은 곳에 이성으로 컨트롤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심겨져 있는 것일까.


어디선가 우발적인 총성이 울리는 순간, 잠재되어 있던 어떤 스위치가 눌려 사이좋게 지내던 남북의 병사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만이 아니라 종종 한일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는 스토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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