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多磨), 죽음을 먹고 사는 마을:

근대 일본 ‘공원묘지’의 탄생과 공공적 사용

by 이루카

다마영원(多磨霊園)의 사자(死者)들


내 평생 혼자 카메라를 들고 ‘공동묘지’를 찾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도쿄 유학중이던 2003년의 어느 여름날, 한 손에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마영원을 향해 신주쿠(新宿)에서 익숙하지 않은 교외 전철을 탔다. 낯선 다마(多磨)의 거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죽음을 먹고 사는 마을’이라는 표현이 뇌리를 스쳤다. 다마역에서 다마영원에 이르기까지의 거리에는 다양한 종류의 비석과 묘지 장식물을 거래하는 전문점과 추모객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마을처럼 보였다. 마을 전체에 ‘죽음’의 기운이 맴도는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마주하게 된 근대 일본의 많은 크리스천들 가운데,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와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를 비롯한 대부분의 저명한 크리스천 운동가 ․ 교육자들이 ‘다마영원’이라는 곳에 묻혀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참이었다. 근대 일본의 근현대 역사 특히 그 생활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는 자로서, 그러한 이유와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근대 이전의 일본에서 장례는 사원의 승려에 의해 불교식으로 집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6~17세기 한동안 확대되었던 서양의 그리스도교를 추방한 후 성립한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그리스도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백성 모두를 사원에 등록하도록 강제한 이래,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불교식 장례가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사원 안에 마련된 묘지에 개별적 토장(土葬), 혹은 화장 후 분골의 형태로 선조와 함께 안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근대에 이르러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 후 크리스천이 되었던 이들이 자신들의 선조와 함께 불교의 사원에 잠드는 일은 불가능했으리라. 아마도 이들을 위해 별도의 근대적 혹은 서구적 묘지가 마련되었으리라는 상상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후 연구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필자의 주된 연구대상이었던 여성운동가뿐 아니라 정치가와 사상가, 심지어 침략전쟁을 수행했던 이른바 ‘전쟁의 영웅’들까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의 근대 일본의 저명한 인물들이 이곳 다마영원에 묻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천을 위한 묘지’이리라는 막연한 가설은 자연스레 잊혀졌고, 언제 한번 직접 찾아가서 어떤 사람들이 묻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당시까지는 아직 인터넷 사용이 지금처럼 편리하지 않았고, 인터넷으로 접속하면 다마영원의 내부 지도뿐 아니라 그곳에 묻힌 저명인들의 이름이 친절하게도 발음순으로 정리되어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마영원 탄생의 역사적 경위와 전개


그날이 내 생일이었는지 혹은 무슨 기념일이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일본에서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초조함이, 늦게까지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던 나를 ‘오늘은 어딘가 의미있는 곳을 견학하자’라는 쪽으로 이끌었다. 졸린 눈을 비비느라 중간에는 전철 노선을 헷갈린 탓에, 다마영원에 도착한 것은 5시 30분 폐장 시간을 세 시간도 남겨놓지 않은 때였다. 안내인은 친절하게 준비된 지도를 건네주며 유명인의 묘지가 어느 쪽에 많은지도 알려 주었다. 나와 같은 종류의 방문객이 많고, 또 익숙하다는 증거였다. 흐린 날씨에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 같이 축축한 공기, 묘비 위에 여유롭게 드러누운 고양이들의 시선이 범상치 않은 공동묘지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수도 도쿄의 규모는 매우 급격히 커졌다. 개항 직전 100만 정도였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20년경에는 235만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시화에 비례하여 늘어난 사망자의 사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야만성과 위생문제 등을 이유로 1873년 잠시 ‘화장’이 금지되었지만 이는 임시방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토장’ 역시 위생적이라 할 수는 없었을 뿐 아니라, 급격히 도시화하는 도쿄 안에 필요한 만큼의 묘지를 확보하는 길은 요원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주택지와 상가를 확보하기 위해 있던 묘지조차 없애야 할 형편이었다. 논란 끝에 화장금지는 곧 해제되었지만, 당국과 대중 모두 묘지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당시 도쿄시에서는 ‘공원과’에서 ‘묘지’업무까지 함께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공원과에 근무하던 이노시타 기요시(井下清)라는 인물이 새로운 묘지건설의 중책을 되었고, 자연스레 그는 공원과 묘지의 조화를 꾀했다. 즉 서구의 묘지문화를 두루 섭렵한 후에 일본에 적합한 ‘정원식 묘지’(=공원묘지)를 조성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일본적 전통과 서양 정원묘지의 장점을 혼합한 일본 최초의 공원묘지인 ‘다마영원’ 조성에서 핵심이 되었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원묘지에 대한 ‘전체적인 구상’ 하에 구획하여 통로 ․ 광장 등을 만들고, 여기에 잔디 ․ 화원 ․ 장지(葬地) ․ 기타시설 등을 조화롭게 배치한다. 각각의 묘소에서 묘지 자체의 사용면적은 용지의 30% 이하로 하고 나머지는 장식 등에 할애한다. 개별의 묘소를 임의적으로 꾸미기보다 전체 다마영원의 구상에 맞게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정원이 되도록 한다. 이를 통해 다마영원이 사자(死者)뿐 아니라 산자들에게도 휴식과 회복의 장소가 되도록 한다. 대중이 계급의 차이를 느끼지 않도록 공평하게,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한다.


이상과 같은 정원식 묘지 건설의 방향이 확정된 후, 그 건설과 개장은 아래와 같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 개장>

당연히 다마지역 30만평이라는 부지 매입은 주민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부지 매입뿐 아니라 이를 묘지로 조성하는 데도 거액의 재정이 필요했음에도 다마영원의 설립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적극적으로 도쿄를 개조하려던 시장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묘지까지의 접근성 제고를 위해 전철을 유치하기 위한, 그리고 여기에 들어가는 재정을 절감하기 위한 철도회사와의 끈질긴 교섭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다마영원이 일반인을 위한 묘지로서 개장한 것은 1923년 4월의 일이었다. 1차에는 일단 3만평이 묘지로 조성되었다.

전통적인 묘지와는 다른 낯선 형태의 묘지였음에도 대중적인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도쿄 시내에서는 묘지가 부족하여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고, 달리 묘지를 확보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묘지를 신청한 후 이를 부당하게 다시 매매하려는 이른바 ‘전매(転売)업자’들 때문에, 당국은 도쿄와 다마의 거주자로 신청자격을 제한해야 할 정도였다.


<제2차 개장>

다마영원 개장으로부터 5개월 후인 1923년 9월에는 간토대지진(関東大震災)이 발생한다. 도쿄의 동북부 시타마치(下町)를 중심으로 전체 면적의 1/3 이상이 불타고 도쿄 주변에서 10만 명 전후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참사는 다마영원 관계자를 다시 한 번 분주하게 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당연하게도 지진 때문에 발생한 대규모 사망자를 급히 수용하기 위해 새로이 장지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로는 도쿄시 당국이 대진재를 기회로 삼아, 오랜 숙원사업이던 도쿄 시내의 ‘사원 경내 묘지’의 교외 이전을 감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즉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거주지와 상가를 확보하는데 부심하던 도쿄시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불교 사원의 경내(境内) 묘지에 눈독을 들였다. 이를 교외로 이전하도록 종용했지만 정서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고, 당국으로서도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대진재 후 새로이 도시재건계획을 수립하는 가운데 이를 법률로 제정하여 강제할 명분과 동력이 생겼다. 이미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사원들로서는 교외에 부지를 사여하고, 심지어 기존의 묘지 터를 유리한 조건으로 사용하게 해주겠다는 당국의 조건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간토대지진이 도쿄의 도시계획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지만, 이른바 ‘묘지문제’와 관련해서도 의미있는 사건이 되었던 셈이다. 다마영원은 10만평의 제2차 개장을 서둘러야 했다.


<제3차 개장>

이후 한동안 다마영원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대중적으로 화제를 모을 일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대중의 인기를 끌어 제3차 개장이 필요해지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1934년 5월, 러일전쟁 승리의 주역이자 일본 해군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가 사망했을 때였다. 도쿄시는 당시 독보적인 ‘전쟁의 영웅’이었던 그에게 다마영원 내에 최초로 ‘명예묘지’ 48평을 제공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의 장례식은 ‘신하의 국장(国葬)으로서는 공전(空前)이라고도 할 정도로 성대한 의식’으로 엄수되었는데, 30년 전 러일전쟁 당시 그와 함께 전함을 탔던 노병(老兵)들이 다마영원에 초소를 만들고 조를 짜서 50일 동안 밤낮으로 그를 지켰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했다.

다마영원은 도고 헤이하치로의 이름과 함께 다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평소 매년 17만 정도였던 참배객은 두 배로 증가했고, 그와 같은 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신청이 쇄도했다. 도고의 사망을 계기로 인기가 급등하자 다마영원은 제3차 개장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마영원의 공공적 사용법


한 손에는 유명인의 묘지가 표시된 지도를, 다른 한 손에는 산지 오래지 않은 니콘 쿨픽스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길치인 사람은 원하는 묘를 찾기 어려울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폐장 시간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둘러보고 싶은 인물들의 묘지는 시간 안에 다 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묘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조형물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차분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한국에서 보던 봉긋한 분봉이 일사불란하게 늘어선 공동묘지와는 달리, 봉분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각각의 묘들은 독특한 모양과 장식물을 뽐내고 있었다. 비슷한 모양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비석과 장식물 때문인지, 공사 중인 묘의 깜깜한 내부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려다 살짝 소름이 끼친 순간을 제외하면 내가 공동묘지를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쉬웠다. 실제 인근에 사는 주민들로 보이는 이들은 개나 유모차를 끌고 영원 내를 느긋하게 산보하고 있었다.


다마영원은 도쿄 시영(市営)으로 설립되었던 만큼, 보다 근대 일본을 통해‘공공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다마영원 안에 대규모로 ‘무연고자’의 묘를 조성한 것이나, 당장 일가족의 묘를 만들 수 없었던 도쿄 거주민을 위해 임시유골보관소를 만들었던 것은 가장 단순하고 전형적인 사례였다. 연고자도 없이 노숙자로 사망한 이들이든, 지방에서 도쿄에 흘러들어 정착하기는 했지만 쉽게 고향을 찾을 여유가 없는 지방출신 도쿄 거주민이든, 근대 일본에서 급격하게 이루어진 도시화의 산물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사용법이라면 유명인의 ‘위령’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는 점이리라. 앞서도 소개한 것처럼 도고 헤이하치로 이래로 일본의 유명인,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래 전사한 장수들은 떠들썩한 보도와 함께 다마영원에 안장되는 일이 잦아졌다. 수도 도쿄에서 비교적 멀지 않아 접근성이 뛰어나며 상대적으로 널찍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마영원은 정책적으로 많은 추모객을 유도하기 위해 유명 군인의 묘지로 선택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장렬하게 전사한’ 장수들을 개별적으로 일족의 묘지에 매장하기보다는, 국민적 전의를 고양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공공성이 강한 이곳 다마영원에 유치하고자 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묘’라는 장소의 사용은 대개 개인이나 일족을 위한, 좀 더 범위를 확대하더라도 공동체적으로 사용되는 정도였지만, 근대 일본의 ‘공원묘지’는 공권력에 의해 조성되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보다 공공적인 공간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미담(美談)과 비극이 교차하는 무대


만져질 만큼 습기가 진했던 눅눅한 공기가 부슬부슬 안개같은 비로 변하기 시작했다. 산보하던 사람들은 우산을 꺼내들었지만, 잠결에 뛰어나온 그리고 일본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우산을 준비했을 리 만무했다. 결국은 목표로 했던 일부 구역을 포기해야 했다. 하나라도 묘지를 더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폐장 전에 출구로 가야 한다는 마음이 뒤섞여, 살짝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남들은 출구를 향하는데 나 혼자 반대로 달려가느라, 혼자 남겨지는 느낌 때문이었다.

목표로 했던 마지막 묘소를 돌아보고 인적이 드문 그곳을 서둘러 벗어나려는 순간, 한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모르게 묘지 옆 고양이의 사진을 찍고 싶어 카메라를 내밀었다. 하지만, 결국은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고양이의 눈이 하나로 보였고, 당황해서 손이 떨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혹시나 셔터 누르는 소리가 외눈 고양이를 자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비 내리는 저녁 인적없는 공동묘지에 나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출구를 향해 비속을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신문을 뒤적이노라면 이곳 다마영원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진 몇 가지 흥미로운 사연들을 발견할 수 있다. 1938년 『아사히신문』에는 도고 헤이하치로 무덤에서 벌어진 한 사건에 대한 단신기사가 실렸다.


반도 출신 김남길(金南吉)과 박양조(朴良祚)라는 전과자 두 사람이 … 다마묘지 전문으로 … 가격 1800엔 이상을 훔쳐왔으며, 피해를 입은 묘는 200개가 넘는다. 이 두 사람은 지난 24일 밤도 마찬가지로 한창 나쁜 짓을 하던 참에 그 묘가 도고 원수의 것임을 깨닫고야 비로소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원수의〕묘 앞에서 개심(改心)을 맹세하고 … 〔지인에게〕신상에 대해 상담하러 왔다가 체포되었던 것….


도고는 죽어서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부랑아를 ‘회심’시킬 정도의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 다마영원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미담이 발생하는 장소로서는 종종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32년에 발생한 5.15사건으로 살해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당시 총리대신과 관련하여 다마영원의 이름이 등장한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35년 『아사히신문』의 「5.15 인정의 꽃(人情の花)」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기사에는, 5.15사건 당시 이누카이를 지키려다 부상을 입어 결국은 사망한 다나카 고로(田中五郎) 순사의 유족에게 이누카이 쓰요시의 아들 겐(健)이 다마영원의 묘지를 구입해서 제공했다는 미담이 실렸다. 사건 이후 줄곧 다나카의 병상과 가족의 생활에 신경을 쓰던 그가, 그의 사망 후에는 아버지와 같은 도쿄 시내 아오야마(青山)묘지에 안치하려 했고, 장소를 확보할 수 없자 ‘최소한 도쿄에서 가까운 다마묘지에라도’ 그를 위한 묘소를 마련하겠다는 뜻을 유족에게 전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던 것만큼, 기사를 읽은 이들의 마음도 훈훈해졌으리라.

또 하나 다마영원을 무대로 벌어진 일을 소개하자면, 종종 이곳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1935년 1월에는 30세경의 남자가 실직의 어려움 끝에 선조의 묘소를 찾아 자살했다.1939년 3월에는 역시 다마영원 내의 묘지 앞에서 각각 약 40세, 24~25세 정도의 여자 두 명이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본래 도쿄대 법대 출신의 은행 지점장이었던 남편이 사망한 후 3년째 되는 기일을 맞이하여, 죽은 남편의 묘지 앞에서 21살의 하녀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는 사연이었다. 함께 목숨을 끊은 하녀의 경우, 그의 언니가 이 부부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여주인의 소개로 시집을 간 후 언니의 뒤를 이어 하녀로 상경, 그동안 가족처럼 지내왔다는 제법 자세한 설명이 더해지고 있다.


다마영원, 근대 일본사의 축소판


폐장 시간인 5시 30분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다마영원의 출구에 도착했다. 마치 내가 떠나기를 기다렸던 듯, 그동안 부슬거리던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져 후두둑후두둑 방울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를 뚫고 다마역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출구에서 가까운 어느 주택의 처마 밑에 잠시 비를 피했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비였다. 심난한 마음으로 멍하게 비를 응시하고 있던 내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깨보다 낮은 담장 너머로 나의 몰골을 지켜보던 그 집의 주인이 투명한 비닐 장우산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거 쓰세요.” 생각지 못한 친절에 당황하며 우산을 받아들며 보니, 다마영원 안에서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달리던 중에 애완견과 함께 산보를 하고 있던 그의 모습을 본 기억이 나는 듯도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본래 관혼상제와 같은 전통적인 관습은 외부의 영향으로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다마영원’은 근대 일본의 역사 속에서 비교적 무난하게 스며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탄생은 급격한 도시화라는 근대 일본의 역사적 현상 가운데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정원묘지’라는 형태가 되었던 것은 이노시타 기요시라는 개인의 관심과 ‘공원과’에서 ‘묘지’업무를 담당하던 행정적 구조라는,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인구의 급증과 도시화로 인한 공간 부족의 심화에 간토대지진까지 겹치면서, 다마영원은 근대 도쿄인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해갔다.

시영(市営)라는 성격을 살려 다마영원은 다양한 형태로 대중을 위한 공공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전쟁기에는 이전 사원이나 신사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역할을 대신하여 대규모적인 추모와 위령의 공간으로 부상했다. 이곳에는 저명한 군인의 화려한 묘소뿐 아니라 다양한 양태의 전몰자를 위한 기념물이 세워졌고,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0년대에는 식량증산을 위한 농작물 재배에 활용되기도 했다.

개인적이기보다는 전체적인 조화와 풍광을 고려한, 사자뿐 아니라 산자를 위한 공공적 공간이 되고자 했던 다마영원은 이처럼 전쟁과 함께 다른 의미의 공간으로 오용되어 갔다. 근대 일본의 역사의 전개 속에서 탄생했던 것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전쟁의 영향 속에서 점차 본래의 방향을 상실해 갔던 것은, 다마영원을 근대 일본사의 축소판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러한 변질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고 심지어 자기 손으로 앞장서 수행했던 이가 다마영원의 기획자였던 이노시타 기요시 자신이었다는 점도, 다마영원을 근대 일본 역사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보이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2014.6. B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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