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는 自閉. 즉 스스로 문을 닫고 갇힌다는 뜻이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꼭 문을 걸어 잠근 채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지내는 것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말하는 게 이상하고, 행동도 이상하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을까 그것도 이상하고, ‘우영우’라는 이름도 이상하고 그래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상한 변호사를 통해 안 이상하다라던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이상했던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상한 쪽은 오히려 우리고 그녀는 전혀 ‘안 이상한 변호사’이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러 이상하고 요상한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방구뽕씨 이야기는 결국 ‘이상한 우리’ 속에 살고 있던 ‘이상한 나’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
한 남자가 학원을 가기 위해 학원차에 탑승해 있던 어린이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간다. 남자는 아이들과 한나절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내려온다. 이후 남자는 미성년자 약취유인죄로 재판을 받게 되는 데 그의 이름이 바로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방구뽕’씨다.
방구뽕씨는 아이들 앞에서 자신이 만든 어린이 해방 선언문을 낭독한다.
“나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방구뽕은 어린이를 위한다는 학교와 학원, 부모의 간교한 주문을 현재에 물리치고 지금 당장 행복한 어린이를 위해 노래한다.
하나,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둘,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셋,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부모는 기억하고 있다. 걷지 못했던 아이를 붙잡고 걸음마 연습을 하던 때. 말 한마디 못한 아이가 처음 엄마, 아빠를 말하던 때. 처음으로 엄마랑 떨어져 어린이집을 보내던 때. 엄마의 기억 속에 아이는 참으로 미숙하고 약한 존재다. 그래서인지 숨을 쉬듯 자연스레 생각해버리고 만다. 부모인 내가 내 아이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세상, 아이의 과거 세상은 뼈저리게 안다. 그래서 부모의 ‘살아보니’라는 말로 ‘안 살아본’ 아이를 부모가 앞서 설계해 놓은 세상 속에 순종하며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모가 내다보는 세상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안경으로 들여다본 세상이다. 미래는 부모가 '안 살아본' 것이지만 아이는 곧 '살아볼' 삶이다. 아이는 현재의 생생한 눈으로 부모보다 더 선명하게 자신의 미래를 본다. 그러니 인정하자. 때론 부모도 과거에 눈이 멀어 아이보다 더 무지해질 때가 있다고 말이다.
드라마에서 우영우는 방구뽕씨를 미성년자 약취유인죄가 아닌 사상범으로 보고 아이들을 향한 그의 철학, 사상 그 자체를 변호하기로 한다. 사람의 생각, 사상은 법으로도 보호받고 존중받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이 존재한다. 세상에는 어른과 다른 어린이의 생각도 존재한다. 세상에는 엄마의 생각과 다른 아이의 생각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는 내 생각과는 다른 유준이, 희준이의 생각이 존재한다.
내가 철옹성처럼 설계해왔던 아이의 세상을 조금씩 깨부수고 그곳에 아이들의 작은 모래성이라도 쌓도록 해두어야겠다. 쌓고 또 허물고 또 쌓고 허물고 할 수 있는 그런 아이들의 작지만 소중한 자유라도 지켜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