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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Jul 17. 2022

돼지꿈을 당근에 내어놓습니다.

남편이 이것 좀 보라며 핸드폰을 건넨다. 오징어 땅콩 한 알의 사진이다. 오징어 땅콩의 얼룩덜룩 짙은 무늬가 마치 웃고 있는 인간 얼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오징어 땅콩 한 봉을 뜯어먹다 우연히 그 한 알을 쥐어든 이가 그게 퍽이나 자랑스러웠나 보다. 그걸 팔겠다고 웃는 얼굴의 오징어 땅콩이라며 4천 원에 내놓았다. 


나는 그 한 알의 과자가 거래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오징어 땅콩의 유별난 애호가인 누군가에게 행여 부서질세라 엄지와 검지로 사뿐히 쥐어든 과자 한 알을 건넨다. “보시죠? 웃는 얼굴 맞죠?”하고 확인시켜주자 상대는 또 부서질세라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레 건네받고 다른 손으로 천 원 4장을 건넨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과연 그 오징어 땅콩을 먹을까? 아님 웃는 얼굴이 상하지 않게 어딘가에 고스란히 잘 세워둘까?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자신이 쓴 일기장을 내놓은 초등학생도 보았다. 머지않아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되면 더 비싸질 테니 지금 쌀 때 가져가란다. 자신의 지역구 의원을 당근에 내놓기도 했단다. 나눔으로. 별 쓸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러다가 어젯밤 꾼 돼지꿈까지 팔 기세다. 오래전 농담으로 남편을 판다고 덤으로 시어머니도 얹어준다는 우스개 소리도 당근에서 현실화되지 않을까 싶다.




자신에게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는 중고물품을 그것이 필요한 동네 사람에게 판다는 당근 마켓.(당신 근처 마켓이라 당근 마켓이란다.) 과거에는 상품의 가격이 시장이라는 공간에서 공식적, 획일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당근 마켓에서는 개인의 주관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가격이 결정되고 같은 물건이라도 상태, 판매 혹은 구매 시기, 필요성에 따라 그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또한 기존 시장에서는 공급자가 가격 결정자였으나 당근 마켓에서는 구매자가 곧 가격결정자이다. 어찌 되었든 내놓은 물건이 팔려야 거래가 완료되는 것이고 거래된 가격이 곧 그 물건의 확정된 가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격의 주도권이 물건을 파는 내가 아닌 그걸 사는 '상대(相對)'에 있다는 의미로 당근 마켓에서 가격결정은 다분히 '상대적(相對的)'이다. 


사용한 물건 뿐만 아니라 사용한 경험 또한 파는 세상이다. 웃는 얼굴의 오징어 땅콩을 우연히 만나는 재밌던 경험을 4천 원의 교환가치로 매겨 그 경험을 내어놓는다. 일면식도 없는 미지의 동네 사람에게 자신이 한 경험의 가치를 평가받도록 내어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까지 상대가 가치를 결정하도록 허용하게 될까? 우리는 어디까지 가치가 돈으로 치환되는 것을 허용하게 될까? 우리 주변에 돈의 숫자로는 매길 길 없는 진정한 가치가 남아있기는 한 걸까? 


진정한 가치는 상대값이 아닌 절댓값이어야 한다. 이유, 장소, 상황을 불문하고 그 값이 변하는 것에 우리는 '진정한'이라는 수식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진정한 가치는 가격을 매길 이유조차 없다. 내가 아니면 도무지 그 누구도 그것의 제대로 된 쓰임새를 모를 것이기에 애초에 교환가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팔지 않고 팔지도 못하는 최종적인 가치는 바로 시간의 양이다. 구체적으로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의 양. 시간의 질이 아니다. 그저 시간의 양이다. 시간의 질은 쉽게 돈으로 그 시간을 꾸며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절대적인 양은 돈으로 늘릴 수 없다. 시간은 “존재”와 직결된다. 어떤 생각, 어떤 시각, 어떤 선택의 그 근저에는 바로 “존재”가 바탕이 된다.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세우고 제대로 자각하게 되면 그 위에 얹어질 수많은 만족감, 성취, 기쁨, 통찰, 행복감 등은 저절로 따라온다. 자연스럽게 “존재”가 그 시간의 질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된 존재가 바탕이된 시간의 양만 있으면 된다. 존재 자체가 예쁘면 돈으로 시간을 치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시간은 충만해진다.  


오징어 땅콩 한알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과거에는 절댓값이었던 것들이 점점 상대값으로 치환되고 있다. 그것 마저도 팔고 싶은 이유에서 일까? 아님 그것마저 자신 스스로가 아닌 상대에게서 제 값으로 인정받고 평가받고 싶은 이유에서 일까? 


나도 사람들도 차마 당근 마켓에 내어놓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숫자로도 바꾸지 못하는 절대적인 가치들을 마음에 몸에 주렁주렁 간직한 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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