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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Jun 27. 2022

천만 원을 잃었다

Photo by Brian Wangenheim on Unsplash


한 여자가 있다. 열심히 직장 생활하며 유리지갑인 월급에서 고용보험료도 따박따박 냈다. 애 낳고 또 하나를 낳아 애들 엄마가 되었다. 애들에 묻혀 지내다 보니 한 달이 지나는지 일 년이 지나는지 모른다. 문득 생각났다. 아! 육아휴직급여!


일한 엄마들이 육아로 쉴 때 고용보험으로 일정 부분 소득을 보장해주는 권리다. 그런데 아뿔싸! 신청기한이 지나버렸다. 휴직 완료 후 1년 안에 신청해야 하는데 이 기한이 지나버리면 그 돈들은 통째 받지 못한단다. 억울한 맘에 행정소송을 했다. 10년간의 긴 싸움으로 결국 원고 승리.  이 소송으로 이제 워킹맘들은 육아휴직급여 신청기한 1년이 지났지만 아직 3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면 언제든 신청하여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우연히 본 뉴스 기사였다. 이 기사가 나의 2017년을 생생히 떠오르게 했다. 뉴스를 확인한 즉시 나는 집 가까운 고용센터에 전화했다. 2017년에 신청기한 1년에서 단 일주일이 지났단 이유로 지급 거절당했던 천만 원에 상당한 육아휴직급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전화기 너머 쏘울 리스 직원의 냉랭하고 재빠른 말투가 연신 ‘나, 바빠’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를 붙잡고 5년 전의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사정 설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절로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힘이 들어갔다. 또다시 억울하고 분한 것이다. 그렇게 그때의 통화는 나를 다시 2017년으로 데려다 놓았다.


한 엄마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천만 원의 돈을 받지 못했다. 기사의 엄마는 소송에서 승리하여 못 받은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소송을 하지 않은 채로 최대 신청기한인 3년에서 더 긴 시간이 지나버린 이유이다. 2017년에 이어 2022년에 또 한 번 거절당했다. 사실 고용센터에 전화를 걸기 전부터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급 거절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거절됐을 때 통제 못할 분노의 감정에 휩싸일까 그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과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맘이 편했다. 이건 마치 불완전 연소된 채 남아있던 2017년의 마음속 분노의 찌꺼기들이 이제야 비로소 완전하게 쓰레기통으로 비워진 기분이었다. 마음이 개운하고 말끔했다. 천만 원의 억울함은 천만 원 그 이상의 보상으로만 풀릴 줄 알았는데 이상했다. 마음이 그렇게 풀려버렸다.


영어로 책임감은 ‘responsibility’. response와 ability가 합쳐진 말이다. 영어의 어원을 그대로 빌어 본다면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떠한 것에 제대로 된 반응을 하는 것이다. 이 말에는 우리가 ‘어떤 것에 반응하는 것’이 자동반사의 원리가 아니라 그 안에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의 여지가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든 반응에 앞서 보다 다르게, 보다 나은 반응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날 고용센터와 통화 후 나는 그날의 내 감정에 책임을 다 했다. 천만 원의 지급 거절로 마치 천만 원의 손해를 본 듯 또 한 번 격분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보상받았다 생각하기로 ‘선택’했다. 비록 나는 아닐지라도 나와 같은 누군가가 보상받을 수 있도록 시정되었다면 이 일에 대해 나는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우습다. 나를 삼켜버릴 듯 기세 등등했던 화는 참으로 엉뚱하게 시시하게 풀려버렸다. 한 개그맨이 그런 얘기를 했다. 화난 와이프를 상대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그냥 웃겨버린다"였다. 한번 웃어버리면 화는 끝난다고... 그간 내가 너무 화에 겁을 냈나 보다. 화는 이다지도 쉽게 풀려버릴 걸. 굳이 가족의 생계나 직책 앞에서 책임감을 앞세울 필요가 없다.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다한다면 결국 모든 것에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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