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닌 말이지. 지금도 그때 꿈을 떠올리면 마음이 금세 눈물로 차서 울렁울렁거려. 별 것 아닌 꿈인데. 꿈에서 들은 그 한마디가 며칠간 내 귓가를 때렸지. 그 꿈은 이랬어.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는, 나이 20대 중, 후반 어느 무렵 한때 친하게 지냈던 동료, 아니면 친구였던 것 같아. 그녀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설레는 맘으로 만났지. 오래간만에 육아에 대한 긴장감에 해방되어 그 친구와 차도 한잔 마시고 밥도 먹었어.
난 그때 카멜색 재킷을 입었어. 그 재킷은 언니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웠을 때 즐겨 입던 옷이었어. 회사에서 6개월간 영국에서 연수생으로 보낸 적이 있었어. 그때 영국의 한 자선단체 매장에서 중고로 산 옷이었는데 영국풍의 멋들어진 재킷이었지. 잠깐 입고 버릴 셈으로 영국에서만 입었고 한국에서는 한두 번 걸쳐 입은 게 다였던 옷이었어. 그 옷을 입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거야.
그런데 순간 내 옷소매를 봤는데 화들짝 해버렸지. 옷에 너무 많은 때가 묻어있고 옷이 다 해져있던 거야. 악취가 나는 누더기 옷이었어. 나는 그 옷의 더러움을 친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지. 그러면서 나의 누더기 옷을 변명하듯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한탄하듯 늘어놓았어.
“자, 이제 집으로 가자.”라는 친구의 말에 카페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한적한 길을 걸었는데 친구가 내 팔짱을 끼는 거야. 순간 얼어붙었지. 악취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결국 친구는 팔짱 낀 팔을 제 코에 갖다 대고 킁킁 대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더라고.
“너, 제발…….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되겠니?”
친구의 말에 난 ‘너, 여태 내 얘기를 뭘로 들었니?’라고 역정을 내려다 힘없이 대꾸했지.
“나, 옛날로는 못 돌아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잖니….”
그때부터였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차올라 펑펑 울었던 게. 시간은 오로지 순행만 할 뿐 역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나 억울하고 서럽던지. 한동안 구멍 뚫린 가슴을 안고 사는 듯 헛헛한 기분에 빠져 지냈었지.
경력단절? 아니 경력 소멸에 경력 증발이야.
얘, 요즘 한국사람들이 평균적으로 49.3세에 은퇴한다지? 근데 여자들은 그보다 더 일찍 조기 은퇴를 경험해. 바로 결혼, 출산 말이야. 이걸 경력단절이라고 하던데, 언니가 경험해보니 이건 경력 소멸, 경력 증발 수준이더라고. 육아가 시작된 후 경력을 잇는다는 건 끊어진 철로를 다시 재건하는 것처럼 버거운 여정이야.
꿈 많던 10대에서 대학 가느라 그 꿈 한번 접고, 취업한다고 그 꿈 또 한 번 접고, 결혼하고 출산한다고 한번 더 접었었지. 이젠 그 꿈들이 아예 소멸할 노릇이지?
그런데 희한한 건 뭔 줄 알아? 그렇게 누르고 눌러도 다시 되살아나. 여름 내내 납작하게 압축 보관했던 겨울이불에 약간의 바람만 들어가도 그 솜들이 다시 되살아나듯이. 그게 언제 움츠렸냐는 듯이.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들어봤지? 주머니 속에 송곳 말이야. 아무리 깊숙한 주머니에 꽁꽁 숨겨놔도 결국 주머니를 뚫고 그 뾰족한 것이 얼굴을 쑥 내미는 거야. 그게 재능인 거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너 자신만은 확실히 아는 거지.
김연아, BTS처럼 전 세계 제패를 해야 그게 재능이니? 어디 세상에 1등만 살디? 세상이란 대부분의 1등 아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야. 그러니 다 제하고도 덩그러니 남아있는 그거. 그것도 나름 재능인 거야. 그렇게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거라면 그 재능, 그 꿈 믿어도 돼. 그거야 말로 진짜인 거야.
근데 시간이 없다고? 애들보느라 안 그래도 저질체력인데 그런 거 할 시간 없다고? 얘~ 어디 애 키우면서 여유가 있디? 우리 애들이 나한테 자주 하는 얘기가 있지. “엄마~ 나, 심심해!!” 그럼 내가 대뜸 대꾸해주지. “엄만 정말 심심하고 싶어! 엄마도 좀 심심해하자!”라고. 옛날에 월든이란 호수에서 돈 몇 푼 없이 살다 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란 사람이 ‘가난’에 대해 이런 얘길 했어.
“당신은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경험만을 갖도록 제한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가장 많은 당분과 가장 많은 전분을 내는 재료만을 다루도록 강요받게 된 것이다. 뼈 가까이에 있는 살이 맛있듯이 뼈 가까이의 삶도 멋진 것이다. 당신은 인생을 빈둥거리며 보내지 않도록 보호받게 된 것이다.”
시간 참 없지. 애들 어릴 땐 잠잘 시간도 부족하지. 근데 이 시간이 가난하니 말이야. 이상하게 인생이 명확해져. 시간이 가난하니 시간을 아껴 쓰게 돼. 꼭 해야 할 것들, 해내야 할 것들, 가장 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 심플하고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지. 지금 시간이 가난하다고 언제까지 시간 부자였던 장밋빛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거야? 이 가난한 시간 속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할 수 없는 것들에 더는 아파말고.
네가 이루고 싶은 것에 시간 없음을 앞세우는 것은 성공에는 꼭 “한방”이 있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야. 인생을 뒤바꿀 선택, all or nothing으로 모든 것을 쏟아붓고는 삶이 극적으로 변하는 거. 에이~ 그런 한방 없어. 대부분의 성공의 과정은 하품 날 정도로 평범해. 지지리도 지루하고 심심하다고. 그런 심심한 하루들이 모이고 모여서야 그제야 찐한 성공의 맛을 우려낼 수 있는 거야.
한 번에 완성작을 그려내려 낼 수 없다고. 매일매일 하찮게 소소하지만 꾸준히 덧칠을 더해가며 그림을 완성해나가는거라고. 그러니 너한테도 충분히 승산은 있어. 과거에는 all or nothing의 열정의 집중이 허락되었었지만 지금은 그거아니라도 타협의 능력이 있잖아. 매일 이거해달라는 애들하고 씨름하면서 '이거 하면 그거하게 해주께'하면서 매일 타협하잖아. 엄마만큼 타협 잘 하는 존재는 드물걸?
부족한 시간 속에서 매일 꿈과 현실을 타협해나가면 끊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가는거야. 지금부터 꿈이랍시고 노력해서는 언제 부귀영화 누리냐고? 얘, 그 부귀영화 좀 못 누려면 어떠니? 너 재능 갖고 즐겁게 잘 놀았으면 그걸로 남는 장사 아니니?
그리고 얘, 옛날 얘기는 이제 그쯤 해둬. 그 때로는 못 돌아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지금이 실제 너의 인생이야. 마치 45킬로였던 과거 자신을 동경하면서 60킬로의 지금의 자신은 인정 못하지. 60킬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다이어트는 영원히 성공 못하는 거야. 목표는 45킬로가 아니라 지금의 60킬로를 인정하고 59킬로를 목표로 삼아야 하는 거야.
이제는 카멜색 재킷도 버려야지. 의류재활용함에 던져 넣어야지. 10년 전 옷을 10년 후에도 입어야만 하니? 체형도 바뀌고 취향도 변했는데? 10살 더 먹은 너 자신을 그냥 인정해. 그러고 나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거야.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필요 없어. 지금부터 새 영광을 쓰면 되는거야.
“현재의 이 시간이 너에게 선물이 되게 하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