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자 자리를 반납합니다

by 루니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주사위를 내려놓고

잠시 캐릭터 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삶이라는 TRPG 월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도 애를 썼지요.

그 흔적은 캐릭터 창에 흔적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확률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선의 판정을 내리려 노력했던 기억

쏟아지는 대미지를 감쇄하기 위해 단단한 저항의 벽을 세웠던 시간.

그 모든 경험 덕분에 이젠 웬만한 위기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능숙한 플레이어가 되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trpglife


그런데 말입니다.

효율을 따지고 리스크를 관리하며 '완벽한 캐릭터'에 가까워질수록 마음 한구석에 기묘한 공허함이 차올랐습니다.

드래곤을 잡기 위해 힘과 지능에 모든 스탯을 쏟아붓느라, 정작 이 아름다운 오픈월드에 어떤 꽃이 피어 있는지, 바람은 어떤 향기를 머금고 있는지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직 승리만을 위해 설계된 육각형의 삶은 견고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빡빡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오늘부로 세계관 최강자 자리를 반납하기로요!


그동안 쌓은 경험과 능력을 모두 초기화하고,

최고 티어 갑옷 대신 움직이기 편한 낡은 셔츠를 입고,

전설의 검 대신 길가에서 주운 그럴싸한 나뭇가지를 손에 쥔!


낭만의 캐릭터로 살기로요!

공격력과 치명타 대미지를 위해 올렸던 힘, 민첩, 지능 스탯 포인트를 모두 회수하고 아주 쓸모없는 곳에 투자해 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구름 모양에 이름 붙이기?

커피 온도 미세한 차이 느끼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후에 창밖 바라보기


효율을 관점에서 바라보면 명백히 망한 빌드겠지만...

괜찮습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영웅일 필요는 없잖아요!


누군가는 재미를 위해 마을 어귀에서 낚시하며 노을을 구경하는 것도 세계의 밸런스에 맞는 일이지 않겠어요?


이번 연재는 바로

'망한 빌드'로 살아가는 즐거움에 관한 기록입니다.

남들이 만렙을 향해 질주할 때 일부러 뒤처져서 숲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쁨

비 효율적이지만 삶에서 풍요로운 서사로 채우는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의 새로운 모험은 드래곤 둥지가 아니라 이름 모를 작은 들판에서 시작될 거예요.

최강자는 아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첫발을 내딛습니다.


여러분도 무거운 장비를 잠시 내려놓고 함께 걷지 않으시겠어요?

글 끝에 보물상자는 없을지 몰라도

잊지 못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