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쪽이 소란스럽습니다.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거대한 드래곤의 심장을 찌르기 위한 파티를 모집하고 있네요.
화려한 버프를 두르고,
빛나는 장비로 무장한 플레이어들은
가장 효율적인 공략을 토론하더니 우르르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0.1초의 딜레이도 허용하지 않는 '최강의 빌드', 이른바 '메타'에 몸을 맡긴 자들의 비장한 뒷모습입니다.
그 열띤 행군 행렬에 슬쩍 발은 뺀 저는
행렬과 정 반대인 서쪽 들판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허리춤의 칼로 몬스터 대신 돗자리가 날아가지 않게 누르며,
햇살에 따끈하게 데워진 은빛 갑옷을 난로 삼아 누워
헬멧에 짓눌려 있던 귀를 꺼냅니다.
따뜻한 햇살.
향기로운 풀 내음 가득한 들판에서
하늘 위 구름을 바라보며 즐기는 이 여유.
이런 내 마음을 알아서 일까요?
시야 구석에서 기본 좋은 알림 창이 떠오릅니다.
[나태 고양이 기사의 상태창]
지역 정보: '무명(無名)의 풀밭'
Rank : SSS
[근력(STR)] E - 샌드위치를 들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함
[민첩(AGI)] C - 맛있는 냄새를 맡았을 때 폭발적으로 상승함
[지능(INT)] S -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고차원적 사유에 몰빵 됨
[운(LUK)] S - 누웠는데 등 밑에 돌멩이가 없을 확률
보유 스킬
[광합성] 갑옷 온도가 36.5 이상 올라가지 않습니다.
[몽상가] 마감 압박 디버프 완전 면역
경험치 효율 0에 수렴하는 이 구역에 머무는 이 시간은 명백한 '자원 낭비'이지만, 인벤토리에서 꺼낸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이 순간은 누구보다 '나'를 더 충만하게 합니다.
이때!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다시 메인 퀘스트로 복귀하십시오!'
무의식 속 현실 '메타 플레이'를 강요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조차
가성비와 영양 성분을 따지고, 휴일의 산책조차 '만 보 걷기'라는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직성이 풀리는 '효율'이라는 단어에 잠식된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득 없는 행동은 패배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구름의 흐름을 관찰할 시간조차, 마음 한 구석에 '이래도 되나 '싶은 죄책감 스택을 쌓아 올리곤 하죠.
하지만 배를 깔고 누워 '쉼'이라는 시간을 가져보니 알겠습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의미 없이'수행하느라 '자신을 알아차릴'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요.
남들이 눈을 부릅뜨고 맵 구석구석 탐색하며 보물 상자를 찾을 때, 저는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세상에 없는 지도를 그립니다.
나를 찾는 시간. 나를 풍요롭게 하는 공백은 그 어떤 전설급 아이템보다도 저를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폭풍 같은 레이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경쟁 속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들과 갑옷 틈새로 간지럽게 불어오는 바람의 결.
그 안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엉뚱한 아이디어들은
스탯을 1도 올려주지 않지만, 나의 표정을 부드럽게 바꿔줍니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성과 없는 이 '나태한 플레이'가 이어질수록 방전되었던 마나 수치가 차오르는 기분이 드네요.
이곳엔 '실패'라는 알림 창이 뜨지 않습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경쟁할 필요도 없죠.
다만 남들은 보지 못한 노을의 색깔을 인벤토리에 가득 담을 수 있을 뿐입니다.
'으아악'
샌드위치 가루를 털어내며 기지개를 켭니다.
드래곤을 잡는 파티에 합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드래곤을 잡는 대신 '햇살 아래에서 상상을 수집하는 즐거움'을 선택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