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 기사의 축복

by 루니

요즘 게임들은 참 친절합니다.

게임 내 모든 지형 정보를 '지도'라는 기능

바닥에 빛나는 화살표로 목적지까지 경로와 남은 거리를 표시해 주는 기능

자동으로 목적지까지 이동해 주는 기능

과 같은 넘치는 '시스템 가이드' 편의를 제공받습니다.


그리고 이 편의는 '불편'이란 이름으로 '탐험의 자유'를 사라지게 합니다.


지도가 없다면

지리에 잘 아는 누군가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고,

이 역할을 위해 맵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최적의 길을 개척하는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도 없음'의 상태는 '불편'이 아니라 '축복'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지도가 사라진 순간 비로소 진짜 탐험이 시작되기 때문이죠.


길을 익히기 위해 효율적인 루트 '공식'을 수없이 헤매고 벽에 부딪히며 '몸으로 익힌 길'을 타인과 나누고,

정해진 길이 아니어도 길이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 희열 속에서

나를 찾는...

그럼 모험은 결국 누군가 정해놓은 길에선 찾기 어려울 거예요.


현실의 우리는

사회가 그어놓은 번득한 지도 위에서 '성공'이라는 목적지만 보고 달립니다.

그 과정에서 주변은 보지 않죠.

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는 '길치'가 되었을 대, 비로소 세상의 결을 만지고, 나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길치에게는 모든 골목이 새로운 콘텐츠입니다.

지도를 따라 5분 만에 도착했다면 결코 몰랐을 이를 모를 들꽃 서식지.

낡은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소박한 웃음소리.

그리고 길을 묻다가 시작된 뜻밖의 인연들.

효율적인 유저가 지도를 따라 점을 찍듯 이동할 때, 길치 기사는 그 사이의 선들을 면으로 확장하며 세상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지도를 완벽하게 읽는 기사는 목적지에 가장 먼저 도착하지만,
지도를 잃어버린 기사는 세상을 전부 소유합니다."


물론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서 언제 레벨업 하느냐"

라고 다긋칠 수도 있죠.

하지만 지도가 없는 세계에서 제가 익힌 건 '어디로 가느냐'보아 '어떻게 걷느냐'에 가깝습니다.

스스로 길을 찾아가며 익힌 감각은 시스템이 업데이트되어 지도가 바뀌어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저만의 고유 스탯이 될 테니까요.


문제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도달하는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헤매며 그린 지도는 조금 투박하고 엉망일지라도, 그 안에는 저만의 이야기가 묻어 있습니다.


엉뚱한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당황하지 않고 돗자리를 피세요!


'오히려 좋아. 여기는 지도를 가진 녀석들은 절대 모를 맛있는 열매가 있거든'

이라며 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목적지가 없는 여행은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가끔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끄고 기꺼이 길치가 되어보세요.


화살표가 사라진 곳에서 당신만의 진짜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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