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뿌셔!

by 루니

게임 속 전광판이 반짝입니다.

이번 주 상위 랭킹 플레이어네요.

1위부터 3위는 단상에 올라와 트로피를 들고 있습니다.

이 빛나는 칭호를 단 '괴물'들 아래로 아래로 한참을 내려서야 제 아이디가 보입니다.

전체 상위 68%.

그 옆에는 친절하게 빨간색 하락 화살표(▼)가 붙어 있네요.

방금 전까지 뒷산에서 나뭇가지를 주우며 행복해하던 저는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수만 명의 등 뒤를 쫓아가는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지금 나는 몬스터를 잡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저 숫자를 잡고 있는 걸까요?


"언제부터 게임이 아니라 순위표를 플레이하게 되었을까요?"

랭킹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수만 명의 복잡하고 고유한 플레이 스타일을 일일이 보여줄 수 없으니, '전투력'이나 특정 '점수'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압축해서 정렬한 것이죠.


랭킹의 원래 목적은

"당신의 실력이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를 보여주는 척도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꼬리가 몸통을 흔들기 시작했죠.

플레이가 랭킹을 위해 존재하는 '주객전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게임 속 랭킹의 가장 큰 아이러니가 뭔지 아시나요?

1등 유저의 장비 세팅이 공개되면, 그다음 날부터 2등부터 1000등까지 모두 똑같은 장비, 스킬, 루트를 따라 한다는 점입니다.

'교복 메타'라는 현상이죠.


랭킹을 올리기 위해 효율을 쫓다 보니, 역설적으로 '나만의 캐릭터'는 사라지고 모두가 복제품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1등을 따라잡으려다, 정착 '나'를 잃어버리는 꼴입니다.


현실은 어떤가요?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더 잔인할지도 모릅니다.

'30대 평균 연봉', '결혼 적령기', '또래 대비 자산 보유 현황'...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마음의 상태를 살피기보다, 습관적으로 SNS를 열어봅니다.

그리고 화려한 타인의 스탯 창을 보며 이렇게 말하죠.

"재는 벌써 만렙 찍고 전직했네"

"저 유저는 히든 맵(해외여행) 뚫었네?"


그리곤 남들의 플레이 로그를 보며 내 캐릭터를 수정하려 듭니다.

내 빌드는 너무 느린 것 같고, 내 장비는 초라해 보이니까요.

그렇게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잊은 채, 남들이 달리는 트랙 위로 허겁지겁 합류합니다.

그곳이 내가 가고 싶은 맵인지도 모른 채 말이죠.


랭킹을 부순다는 것은

랭킹에서 내려오겠다는 선언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교의 판 자체를 기권함으로써 내 플레이의 주도권을 되찾는 전략적 선택입니다.


경쟁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소중한 동력이니까요.


하지만 랭킹이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조건'이 되지 말라는 겁니다.

'조건'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게임은 즐거움이 아니라 '노동'이 되니까요.


진짜 '고인물'의 플레이는 어떤지 아시나요?

랭킹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비웃는 비주류 스킬을 마스터하고, 점수가 나오지 않는 맵 구석구석을 탐험합니다.


랭킹 창을 꺼보세요!

놀라온 일이 벌어질 겁니다.

숫자와 그래프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맵'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내 캐릭터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이 숲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옆 동료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있죠.


그러니 랭킹 창을 꺼 보세요.

수만 명의 이름이 나열된 리스트도 사라지고, 다시 저의 캐릭터가 화면에 보일 겁니다.


순위는 사라졌지만, 내 캐릭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죠.


오늘은 사냥 대신, 맵 한가운데에 돗자리를 펴고 커피를 마시며 NPC와 수다 떨기 퀘스트를 수행할 생각입니다.

누군가는 순위가 떨어진다고 걱정하겠지만요

괜찮습니다.

남들과 거리를 재는 대신, 내가 서 있는(좌표)를 확인하면 이 좌표 위에선 1등은 아니어도 유일한 플레이어로 서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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