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훈장
한참 몰입하며 게임을 즐기고 있던 도중
'띠링'
하고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화면 상단에 금빛 배지가 뜹니다.
[업적 달성!]
‘전설의 탐험가’
전 세계 상위 0.3% 유저만 도달한 절벽 끝에 도착했습니다.
열심히 돌아다닌 보람이 있네요. 기분이 꽤 좋습니다.
알림 목록 중 수행한 업적을 확인하다 보니 괴상한 업적이 눈에 띕니다.
[업적 달성]
‘돌멩이 수집가’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1,000개 이상 가방에 넣고 다녔습니다.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업적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괴상한 업적 달성 배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봅니다.
그 돌멩이 하나하나를 줍던 멍청했지만 즐거웠던 시간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까요.
‘업적(Achievement)’은 무엇일까요?
실력을 평가하는 도구일까요?
아니면 메인 퀘스트(성공, 승진, 결혼)만이 의미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시스템일까요?
"네가 점프를 100번이나 했구나"
"네가 비 오는 날 낚시를 했구나"
"네가 포기하지 않고 10번이나 죽고 다시 도전했구나"
업적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 잉여로운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록해 줍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죠.
제 업적작을 보시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만든 히든 업적리스트입니다.
남들이 보면 "그게 뭐야?"라고 비웃겠지만, 제 난이도 기준으로는 '신화급 레이드' 못지않은 과업들입니다.
[업적: 사일런트 닌자]
조건: 모두가 잠든 새벽 3시, 컵라면 뚜껑을 소리 없이 따고 국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완식함.
[업적: 눈물의 타이핑]
조건: 억울해서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오타 없이 정중하게 업무 메일 회신을 완료함.
[업적: 감정 쓰레기통 방어전]
조건: 30분간 이어지는 하소연 전화를 듣고도 "그렇구나"라며 영혼 있는 척 리액션 방어에 성공함.
이력서에 한 줄도 적을 수 없는 일들이지만, 저는 이 업적을 쌓는 과정에서 그 새벽 라면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울면서 보낸 메일에 얼마나 큰 인내심이 필요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남이 인정하는 업적만 세기 시작했을까요?
타인의 박수가 없는 성취는 정말로 가치가 없는 걸까요?
업적은 사실 전시품이 아니라 '타임캡슐'입니다.
업적의 진짜 묘미는 '과시'가 아닌 '기억의 타임캡슐'이기 때문이죠.
이력서에 적힌 '대리', '차장', '팀장'이란 글자는 차갑지만, 내 마음속 업적 창에 적힌 '퇴사하고 싶었던 날 아침', '출근하는 날 바라본 하늘'과 같은 기억의 배지는 뜨겁습니다.
통계에 남지 않는 회복
누군에게도 말 못 한 용기
무너질뻔하다가 가까스로 잡은 멘털
이 모든 것이 내 캐릭터의 서사(Story)입니다.
세상은 결과만 보고 "운이 좋았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압니다.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내가 획득한 수백 개의 자질구레한 업적들을요.
그것은 훈장이라기보다, 내가 나에게 찍어주는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쉽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성과를 내지도 못했고,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잠들기 전 열어본 업적 창을 열어, 오늘의 일일 업적의 체크 박스 하나를 채웁니다.
[일일 업적 달성]
‘오늘도 무사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를 견뎌내고, 내일로 넘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화려한 팝업도, 웅장한 효과음도 없지만 괜찮습니다.
이 게임은 관객이 없어도, 플레이어의 모든 발자국을 빠짐없이 저장하고 있으니까요.
오늘도 업적 하나를 추가한 제 캐릭터가,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