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 플레이

스펙 좋은 딜러보다, 개그 코드 맞는 힐러

by 루니

마을 광장에서 서 있으면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말풍선을 볼 수 있습니다.


[파티 모집] 최종 보스 스피드런 파티 구합니다. 전설 등급 무기 필수!
[필독] 공략 완벽 숙지자. 실수 한 번이라도 하면 바로 강퇴!

수많은 유저가 이 파티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스펙[전투력, 아이템 등급, 클리어 경험]을 증명하느라 애씁니다.


마치 현실의 채용 공고나 노골적인 소개팅 조건을 보는 듯한 모습이 저만의 '낭만 똥템(?)'을 착용하고 서 있던 제 모습과 비교되어 기분이 묘합니다.

완벽한 스펙, 빈틈없는 효율, 오차 없는 플레이,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최고 효율 파티'를 원하죠.

그런 공고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상한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언젠가 운 좋게(?) 완벽한 스펙 파티에 합류한 적이 있습니다.

파티원들의 딜(Damage)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죠.

몬스터들은 스킬 한 두방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고, 던전 클리어 시간은 매번 갱신되었습니다.


하지만 파티 분위기는 살얼음판 그 자체였습니다.

누군가 스킬 타이밍 1초라도 어긋나게 쓰면 채팅창엔 날카로운 물음표 하나가 꽂혔습니다.

실수는 곧 평가로 직결되었고, 저는 파티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키보드를 누르며 내내 숨을 죽여야 했습니다.


최단 기록으로 보스를 쓰러뜨리고 화면에 거대한 [CLEAR!] 문구가 떴을 때, 제게 남은 감정은 성취감이 아니라 "아, 드디어 끝났다!'는 얄팍한 안도감뿐이었습니다.

효율은 최고였지만 제 기억 창고에는 아무런 즐거움도 남지 않았죠.


'나 지금 게임을 한 걸까? 아니면 노동 징발을 당한 걸까?'


물론 반대의 경험도 있습니다.

스펙이 턱없이 모자란 초보 파티였기에, 던전에서 길을 잃는 탱커와 엉뚱한 곳에 힐을 던지는 힐러, 처참한 딜을 넣는 딜러로 겨우 겨우 보스방에 도착했지만, 보스에게 제대로 공격 한 방 날리지 못하고 전멸(Wipe) 당했을 때, 보통 이런 상황이면 서로 남 탓을 하거나 짜증을 내며 파티를 탈퇴하기 마련인데, 이 파티는 달랐습니다.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툭 던진 힐러의 한마디에

"아, 방금 보스랑 눈 마주쳐서 심쿵하느라 힐 늦음. ㅋㅋㅋ"

"다음엔 선글라스 콜? 저도 방금 검 휘두르다 쥐 났음."


서로 웃으며 농담을 건네고, 다음엔 더 잘해보자며 다시 도전했고, 또 전멸했지만 또 웃었습니다.


클리어 타임은 최악이었고, 수리비로 아까운 골드만 날렸지만, 이상하게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중간중간 오가는 실없는 농담과 웃음이 체력 포션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의 멘털을 채워주었으니까요.

이 엉망진창이었던 전투는 꽤 오랜 시간 지난 지금까지도 제 머릿속에 가장 즐거운 플레이로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은 전투의 승패가 오직 [DPS(초당 피해량)]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숫자가 높을수록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중요한 스탯이 숨겨져 있다는 건 모르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장기 레이드에서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해도 변수가 생기고, 실수가 나오며, 때로는 파티 전체가 무너지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때 파티가 해산되지 않고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은 압도적인 공격이 아닌 서로의 실수를 유쾌하게 넘겨주는 여유, 즉 결(Vibe)이 맞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유지력'입니다.


인간관계의 시너지는 '1+1=2'가 되는 단순한 합연산이 아닌, 결이 맞는 사람과 함께할 때 발동하는 곱연산입니다.

완벽한 스펙의 딜러가 당장의 퀘스트를 빨리 깨게 해 줄지는 몰라도, 엉뚱한 순간에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개그 코드 맞는 힐러야말로 게임을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히든 버프(Buff)'인 셈이죠.


현실에서도 자꾸 스펙 좋은 파티원을 찾으려 두리번거립니다.

나를 끌어줄 유능한 사람, 내 인생의 클리어 타임을 줄여줄 효율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피곤한 잣대를 들이대곤 하죠.


하지만 가만히 지난 플레이를 돌아보면, 이 게임에서 랭킹 게시판의 기록은 시즌이 지나면 초기화되지만, 차가운 바닥에 누워 함께 'ㅋㅋㅋ'를 치며 웃었던 채팅 로그는 영원히 남아 저를 미소 짓게 만듭니다.


빠르게 클리어하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함께 웃으며 걷는 시간이 훨씬 소중하는 걸 이제는 압니다.

그러니 스펙이 좀 모자라도, 무시무시한 보스 몬스터 앞에서 "야, 일단 저녁 뭐 먹을래?"라며 농담을 던질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면,

그거 하나로 이 게임을 계속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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