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접속: 다시 던전으로 돌아갑니다

by 루니

솔직하게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대망의 최종화인 20화 마감을 며칠째 미루고 있었습니다.

모니터 앞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수십 번이나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죠.

글이 써지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제 안에서 맹렬하게 피어오른 하나의 질문.

'자격 지심'때문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인터넷 채용 사이트 공고를 뒤적이고 있습니다.

머리로 생계를 위해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압박하는데 가슴은 그렇지 않아 며칠 째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최강자가 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는데...

결국 돌아가는 선택을 하고만 나 자신이 부끄러워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지라고,

랭킹에 연연하지 말고 생존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감사하라 말해놓고선

정작 이 글을 쓰는 본인은 다시 그 치열한 경쟁의 던전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니...


'세계관 최강자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해 놓고, 결국 현실의 무게에 굴복한 위선자가 아닐까?

내가 과연 이 에세이를 완결 지을 자격이 있을까?'

그 지독한 딜레마가 저의 키보드 타자를 멈추게 했습니다.



마을 지붕 위에 누워 며칠을 끙끙 앓던 중.

문득 제 캐릭터 상태 창을 열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억지로 쥐고 있단 무거운 대검을 내려놓고, 맞지 않는 스킬을 과감히 초기화했으며

오프라인 보상으로 푹 쉬며 바닥났던 체력과 마나를 100%까지 꽉 채워둔 상태였죠.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포기했던 것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최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는 것을요.

게임을 끄고 영원히 초보자 마을에 은둔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충분히 쉬고 나니, 역설적으로 제 안에서 다시 파티 플레이도 하고 싶고, 안정적인 골드(월급)도 캐고 싶어지는 순순한 '플레이 욕구'가 차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회사(던전)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전에 제가 뱉은 선언들을 부정하는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내 멘털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한 룰'을 완성 했으니, 이제 어떤 던전에 들어가도 '나답게'프렐이 할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명서였습니다.



예전엔 회사라는 던전은 생존의 공포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뒤처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오버 파밍(야근)을 했고,

랭킹 1위(승진과 안전)가 되기 위해 제 체력을 갉아먹었으며,

실수하지 않고 완벽한 기획을 하기 위해 스킬을 난사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 저는 예전의 그 랭커가 아닙니다.

지금은 가장 화려한 교복 세팅 대신 제게 딱 맞는 편안한 장비를 입을 줄 압니다.

능력치만 높은 딜어보다 바닥에 누워서 농담을 던질 수 있는 동료의 소중함을 알고 있죠.

무엇보다, 던전의 보스가 무리한 패턴(부당한 요구)을 남발하며 제 체력을 갉아먹으려 할 때,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로그아웃'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던전(사회)의 룰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전히 경쟁은 치열하고, 보스는 강력하며, 일일 퀘스트는 지루하겠죠.

하지만 그 던전에 입장하는 플레이어의 마음가짐이 완벽하게 달라졌습니다.


이제 살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을 유지하고 유희하기 위해 아주 시크하고 여유롭게 게임을 즐기는 '고인 물 유저'로 접속할 참이니까요.


처음'세계관 최강자가 되지 않기로 했다'는 선언은 '패배자의 도피'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그건 내 인생이라는 거대한 오픈월드에서, 남들이 정해준 메인 퀘스트의 노예가 아니라 나만의 플레이를 즐기는 '진짜 주인공'이 되겠다는 아주 당당한 출사표였다는 것을요.


이제 저는 마을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창고에 넣어두었던 낡지만 손에 꼭 익은 검을 다시 허리에 찹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멈춰 서 있던 던전의 입구로 걸어가겠습니다.


오랫동안 가보지 않았던 그 길은 예전보다 더 험난하고 복잡한 세계로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아니 두렵지만 설레기도 합니다.

전멸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넉넉한 멘털이 다시 성장하고 발전하는 나 자신이 될 거라며 '세이브 포인트'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까요.


화면 중앙에 익숙한 알람 창이 떠오르네요.

[새로운 퀘스트 구역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Y / N]

입가의 작은 미소가 자연스럽게 그려지네요.

말설임 없이 [Y] 버튼을 클릭합니다.


최강자가 도리 생각은 여전히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다이내믹한 세계를 제 방식대로 유쾌하게 즐겨볼 생각은 차고 넘칩니다.


자, 전의 새로운 파티 플레이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입니다.

그동안 저의 엉뚱한 모험에 기꺼이 파티원으로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일일퀘스트에도 언제나 따뜻한 버프가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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