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두기의 기술

익숙한 패턴의 재발견

by 루니
가까워야만 사랑이 아닙니다. 멀어져야만 숨 쉴 수 있는 관계도 있습니다.

오후 3시 30분.

습관적으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보이스피싱 이후로 애가 기운이 없다. 그래도 눈치 보는 게 좀 안쓰럽긴 한데..."

어머니는 동생의 상태를 걱정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동생 흉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상한 이중성이었죠.

"엄마, 이제 그만하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겐 안 말해. 너니까 말하는 거야."

아, 또 시작이구나.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으니 동생이 눈치를 보며 속상해할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죠.

"괜찮아?"

"응, 뭐가?"

정작 동생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나는 이렇게 가족 사이를 중재하고 있구나.


보이스피싱 사건 이후, 저는 나름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든요. 하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자, 동생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짜증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어왔습니다.

결국 동생을 위한 '개인 회생 절차'를 찾고, 관련 정보를 알아보며 변호사를 찾아다니는 저를 발견했죠.

정작 당사자인 동생은 '속상해서'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데 말이에요.


'아, 나는 아직도 여기 있구나.'

진짜 거리 두기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끊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때처럼 자신의 속상함을 털어놓는 동생을 향해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이 나왔죠.

"너 다 큰 어른이야. 그거 네가 알아봐도 되잖아."

그리고 어머니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도 동생도 다 큰 어른이에요. 엄마가 대신 대변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철 안 든 외삼촌 보면서 느끼는 것 없어요?"

예전 같으면 "괜찮다. 내가 해결해 볼게"라고 위로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도 가족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감정이 먼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후련하지 않은 이유는 제 대화에 짜증이 너무 짙게 섞여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도 동생 스스로 방법을 찾고, 건강을 챙기며 살아갈 힘을 얻기를 바랐지만, 제 말투는 그런 의도와는 한참 멀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저와 가족에게 생소한 '거리두기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또 감정적으로 대응할 것 같았거든요.

제가 생각한 방법은 세 가지였습니다.

즉시 반응하지 않기: 가족의 문제 상황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지?"를 먼저 생각하는 대신 "이게 정말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를 먼저 묻게 되었습니다.

감정과 사실 분리하기: "동생이 걱정된다"는 감정과 "동생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행동을 분리했습니다. 걱정은 해도 되지만, 대신 해결해 줄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질문으로 되돌리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네가 어떻게 할 건데?" 같은 질문으로 문제를 당사자에게 되돌려주는 연습을 했습니다.


완전히 중재자 역할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저 스스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다만 더 이상 그 사건을 들추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백지상태가 된 동생은 매일 한숨과 함께 출근한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은퇴 후 꿈꾸던 한적한 시골 생활은 사실상 멀어졌기에 동생이 안쓰러우면서도 원망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족의 아픔이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중간에 없어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괜찮아지고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니, 미안함과 죄책감에 말을 못 걸던 동생은 이젠 조금씩 가족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돌아보기 위해 병원 상담도 알아보고 있고요.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생전 처음 경험한 빚과 이자는 동생을 점점 더 힘들게 할 테니까요. 하지만 더 이상 누나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돌아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제가 항상 달려가서 해결해 주는 것이 동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생이 스스로 성장하고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기 위해서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보이스피싱 사건은 저희 가족에게 아픈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생은 정말로 회사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상담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과 직접 대화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계시고요. 그리고 저도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저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예전 습관대로 행동할 때도 있고요.

하지만 중요한 건 방향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나아갈 힘을 가지게 된 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성장하다 보면, 저는 제 삶을 살면서도 가족을 사랑하는 법을, 동생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하는 법을 알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원하는 '성공'도 이뤄질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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