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다르게 읽기: 사회 신뢰의 부재와 유대인의 왕

그들은 무엇을 찾는가?

by IsaacK

연말연시를 장식했던 계엄 이후 한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일련의 사건들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들로 인한 수많은 발언들과 정치적 사건들이 진행되었고, 그 여파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금도 진행 중인 윤석열 대통령 탄핵정국 중에 내 눈에 띄었던 것은 부정선거와 관련된 의혹을 거론하며 계엄을 옹호하고, 법원을 상대로 무력시위도 불사하는 극우 진영의 행동들이었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내 생각은 이내 그들의 주장과 행동을 넘어서서, 그들의 행동과 출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그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고민하는데 머물렀다. 이는 계엄을 찬성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반대로 대통령 탄핵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부분이며, 그것이 바로 제목에 언급된 첫 번째 키워드 "사회 신뢰의 부재"다.

언젠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법의 권위와 사적 제재(vigilantism, 정당한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는 모든 형태의 폭력, 유형적 또는 사회적 제재)에 대한 여론 조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조사에서 한국인들은 법의 권위를 존중하는 경향이 여타 선진국보다 낮게 추산되고, 사적 제재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영향은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드러나는데, 웹툰 비질란테, 드라마 빈센조 같은 작품들이 이러한 내용들을 일부 다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법치주의 국가의 근간은 보복의 권한을 피해자로부터 공권력으로 대변되는 법치 시스템으로 옮기는 것에 있다. 개인에게 보복과 폭력을 금하고 사회적 제재로만 이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을 현대 국가의 주요한 특성으로 정의한다면, 미국이란 나라는 넘쳐나는 총기 덕택에 여차하면 '너 죽고 나 죽자'가 발현되는 나라다 보니 현대국가라고 할 수는 절대로 없는 나라지만, 희한하게도 사필귀정을 이루어가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꽤나 견고한 나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총기 금지는 물론이고 개인의 폭력 사용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엄격하게 금기시하는 문화가 있지만, 정작 사법 체계와 법의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레가툼에서 조사한 사회적 자본 순위에서 한국은 OECD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이러한 경향성은 현재 진행 중인 탄핵정국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법부와 재판부는 현대국가 시스템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 보루다. 즉 이들이 내린 결론은 사회적으로 신뢰하고 믿어주는 것이 현대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전제 중에 하나다. 그러나 한국에서 체포 및 구속 영장 심사 결과를 앞두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담당 판사의 성향과 가치관이며, 영장 심사를 청구한 법원이 어디냐가 중요한 이슈가 된다. 왜 그럴까? 담당 판사가 누구든지 법질서와 정의에 맞게 심사를 진행할 거란 믿음보다는, 담당 판사의 정치적 성향과 가치관이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부재할 경우,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온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해서라기보다는 '운 나쁘게' 담당 판사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옳고 그름의 정의 문제가 아닌 운이 있고 없고 - 에 따른 억울함 - 의 문제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의 부재는 진영 논리를 강화시키고, 믿을만하다 여겨지는 자기 진영 내에서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너무나 수용적으로, 반대로 믿을게 못 된다는 자기 진영 밖에서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부가적인 효과가 있다. 그러다 보니 이쪽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받아들여지는 전제와 같은 사실들이 반대쪽에서는 의혹과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번 정국에서는 선관위와 선거 관련 의혹이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형국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만 살펴봐도, 가까운 사람의 말이라도 한 번쯤은 돌아볼 수 있고, 싫은 사람의 말이라도 심각하게 재고해 볼 수 있는 것이 나 자신에게는 더 유익하다. 나는 이 문제가 탄핵 찬반 양쪽 모두에게 (더 나아가서는 한국 전체에) 큰 손실을 알게 모르게 입히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극우 진영의 한 축을 이루는 보수 기독교 진영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메시지에 대해서는 딱히 논평하고 싶지 않지만, 개신교인으로서 이들이 말하는 주장과 관련하여 교리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이 있다. 그것이 이 노트 제목의 두 번째 키워드 "유대인의 왕"이다.

우선 나는 탄핵을 반대하고 윤대통령을 지지하면 참된 기독교인이고,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면 악마의 자식 취급을 하는 그들의 신앙관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의 신학적 주장이 성서적으로 매우 빈약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기독교인이고 아니고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가 로마 식민지 치하 예루살렘 전역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이 예수에게 기대한 모습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드러난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구세주, 병든 사람을 고치고 낫게 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회복하게 하는 창조주, 마지막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결국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했던 로마 치하로부터 유대왕국을 독립시킬 "유대인의 왕"을 꼽아볼 수 있다.

처음에 언급된 두 가지 기대와는 달리, "유대인의 왕"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사람들의 기대에 대하여 예수는 무척이나 냉담했다. 식민 치하의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납세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누 20:25)"라고 답하며 실제로 납세의 의무를 받아들인 그의 행동을 볼 수 있으며, 이외에도 예수는 정치적 왕에 대한 기대를 부정하거나 지탄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사족: 이러한 모습이 마치 예수가 의도적으로 정치 및 경제 시스템에 매우 무관하거나 중립적인 포지션을 취하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사실 그의 발언과 행동을 잘 살피면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과격하며 급진적인 행동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 천년 동안 진행돼 온 경제의 근간 "거래"와 "소유권"에 대해 "거저 주라"며 도끼날을 들이댄 것이 그 좋은 예다.)

사람들을 누르고 세도를 부리는 세상의 통치자들과 달리 (마 20:25) 낮아짐으로 십자가를 지려는 예수를 두고 정치적 지도자를 기대하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말했던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꾸중을 듣는다 (마 16:21-23). 보수 우익 기독교인들은 탄핵 반대와 함께 사회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국판 유대인의 왕을 갈구하지만, 그들의 갈망은 예수와 상관이 없다. 오늘날 예수가 살아 있어서 그들이 예수께 이러한 간청을 한다면 그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어떨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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