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그 대상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미술 작품을 떠올려 보자. 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유명한 그림을 단순히 색깔과 형태의 조합으로 볼 수 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아름다운 그림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미술에 대해 잘 알고, 그 작품의 배경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똑같은 그림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본다. 그 사람은 그림 속 색채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지, 구도와 형태가 어떤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예술적 흐름이나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다면, 작품은 단순한 이미지 이상으로 다가와 감동과 깊은 깨달음을 준다. 결국, 미술 작품을 이해하는 깊이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와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와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단순히 와인의 맛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소믈리에는 그 와인 한 잔을 마시면서 포도의 품종, 와인의 숙성 기간, 지역 특유의 기후 조건까지 파악할 수 있다. 같은 와인을 마시더라도 그 안에서 느끼는 풍미와 깊이는 전혀 다른 것이다. 소믈리에는 와인 한 모금에서 다양한 맛의 층을 경험하며, 어떤 음식과 잘 어울리는지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같은 와인을 마시지만, 아는 만큼 더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아는 만큼 그 대상의 깊은 본질을 더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관찰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 어떤 모르는 대상이 있다고 하자. 만약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모르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이해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는 계속해서 우리가 그 대상을 더 깊이 있게 바라보게 만들고 그 결과 우리는 그것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관찰이란 말을 들으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수학 모의고사 주관식 문제를 자꾸 틀려 수학에 대해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고 3 담임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이셨는데 나는 선생님께 어떻게 해야 주관식 문제를 잘 풀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문제 속에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모든 단서가 들어 있어. 너에게 필요한 건 눈 크게 뜨고 문제를 제대로 읽는 거야. 주어진 상황, 조건 등 혹시나 방심하거나 당황해서 놓치고 있는 게 있는지 꼼꼼히 살펴봐. 그럼 반드시 문제를 풀 수 있는 핵심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정말 문제 출제자는 문제 속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들을 숨겨놓았다. 그 단서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이용 했더니 주관식 문제를 거의 다 맞출 수 있었다. 이 경험은 내게 커다란 인상을 주었고 나는 수학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상황에서도 적용 가능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는 흔히 문제를 해결할 때,당장의 답을 찾는 데만 몰두해 중요한 단서를 놓치기 쉽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문제를 다각도로 관찰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문제 해결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를 제대로 관찰할 때, 우리는 문제 속에 숨어 있는 문제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훗날 내가 디램 반도체의 불량을 개선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언제나 불량 문제 해결은 철저한 현상 파악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불량이 발생하면 우리는 불량이 어떤 특정한 공정이나 설비를 진행할 때 나오는지, 불량이 웨이퍼의 어떤 특정한 위치에 분포하는지, 불량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성분은 무엇인지 등등의 현상들을 철저히 파악한다. 현상을 최대한 많이, 최대한 다각적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그 현상 데이터에서 문제 해결의 핵심 단서를 파악
할 수 있었다.
한편, 관찰은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발견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즈니스에서 소비자의 행동 패턴을 세심하게 관찰할 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트렌드를 발견해 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트렌드를 잘 읽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증권 애널리스트들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트렌드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경제의 흐름 곧, 돈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쫓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의 특별한 능력을 갖고 싶었다. 나도 그들처럼 트렌드를 정확히 읽고 사람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솔루션을 내놓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애널리스트들이 강연하는 비즈니스 트렌드 분석 세미나에수차례 참여했다. 나는 세미나에서 특별한 비법이 등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애널리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했던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관찰’이었다.
트렌드란 특정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필요에 부응하는 제품, 서비스, 문화, 기술과 같은 솔루션의 변화 또는 흐름이다. 따라서 애널리스트들은 트렌드를 잘 읽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솔루션과 동시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필요를 모두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솔루션과 필요를 모두 관찰해 낼 때, 필요에서 솔루션의 방향으로 흐르는 트렌드의 방향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솔루션과 필요를 효과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가? 각 애널리스트 마다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했지만 그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고객사의 고객사’ 관찰법이었다. ‘고객사의 고객사’ 관찰법이란, 단순 하나의 고객사가 무엇인지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객사가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또 다른 고객사들이 무엇인지를 연쇄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당신은 비즈니스를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로 바라볼 수 있고 그 생태계를 이끄는 트렌드를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비즈니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디램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디램을 공급하는 업체로는 삼성과 하이닉스가 있다. 삼성과 하이닉스의 사업보고서와 증권사 기업 분석 레포트를 잘 읽으면 고객사의 고객사를 파악할 수 있다. 디램은 크게 PC용, 모바일용, 서버용 디램으로 구성되며 삼성과 하이닉스의고객사들은 상당수 겹친다. PC 고객사로는 애플, 휴렛패커드, 델, 레노버가 있고, 모바일 고객사로는 애플, 삼성전자, 샤오미가 있으며, 데이터 센터와 클라우드 서비스 고객사로는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다. 그런데 하이닉스의 디램 사업이 영업이익 기준으로 삼성 디램을 처음으로 역전한 2024년, 하이닉스의 주요 고객사를 보면 삼성에는 없는 주요 고객사가 있다. 바로 TSMC이며 TSMC에 하이닉스가 공급하는 제품은 HBM(고대역폭메모리)이다. HBM은 디램 칩을 여러 개 수직으로 쌓아 올려 만든 3D 구조의 메모리로 데이터 전송 속도가 크기 때문에 인공지능, 머신러닝, 그래픽 처리와 같은 분야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품이다. 계속해서 고객사의 고객사 분석을 하면, TSMC는 하이닉스가 공급한 HBM을 사용하여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 칩을 제조한다. 그리고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 칩은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테슬라에 공급되어 AI와 머신러닝에 특화된 클라우드 서비스 플랫폼 구축에 활용된다. 마지막으로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테슬라가 구축한 AI 클라우드 플랫폼을 기반으로 OpenAI, Salesforce, Adobe 등과 같은 유명한 AI 서비스가 소비자에게 공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공유된 사업보고서, 기업 분석 레포트를 고객사의 고객사 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디램 비즈니스의 트렌드를 읽어낼 수 있다. “AI 서비스의 수요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가운데 데이터 센터와 클라우드 서버 고객사는 대량의 데이터를 고속으로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 GPU가 필요하며, 앞으로 디램 비즈니스는 고성능 GPU에 필수적인 HBM 디램 쪽에 집중될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신이 관심사에 대해 고객사의 고객사를 관찰한다면 당신은 트렌드를 잘 읽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작 유
<과학자의 사고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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