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지키는 나만의 작은 사치
월급을 받으면 꼭 '고정지출통장'에 돈을 넣어서 관리한다. 고정지출은 세금, 식비, 통신비, 구독료, 교통비가 있다. 밖에서 잘 안 사 먹고 대부분 집에서 요리를 해 먹다 보니 고정지출에 들어가게 된다. 나머지는 저축과 개인 용돈이다.
기본적으로 근검절약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사치를 모두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돈을 쓰되, 의미 있게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명품을 사더라도, 내가 그 물건에 잡아먹히는 건 싫다. 좋은 가방이 필요해서 럭셔리 물건을 사는 건 좋지만, 럭셔리를 위해서 그 브랜드를 모시면서 살기는 싫다.
: 다양한 도구가 만들어내는 깊은 화폭
처음 미술 학원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시던 선생님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이들은 항상 선생님께
“이렇게 비싼 붓이 그림의 퀄리티를 그렇게나 바꿔요? 이렇게까지 필요해요?”라고 물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나는 나의 실력도 믿지만, 거기에 더해서 도구 역시 경쟁력이 되어줄 수 있다면 여기에 돈을 아끼지 않아.'라고 하셨다.
한국에는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만연하여서 나 역시 그런 순수한 실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일에 있어서 역린이 되는 포인트들을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는 편이다. 평소에는 매우 무던하고 예민하지 않은데, 이상하리만치 작업환경의 퀄리티가 엇나가면 집중이 안 되고 엇나간다.
이를테면 의자에 앉았을 때 다리의 각도, 모니터와 눈과의 거리, 책상이 벽 근처에 안정적으로 위치하는 것, 선 정리, 손 뻗는 거리에 스케치 도구들 배치하는 것. 테니스 선수 나달이 그만의 루틴을 하듯이 작업환경을 나에게 알맞게 조율해 나간다. 그러다 보니 도구의 퀄리티가 가져다주는 효율성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도구 퀄리티에 의한 경쟁력을 넘어, 소비 경험은 나의 경쟁력이 된다. 더 많이 소비해 본 사람이 더 많은 경험을 몸소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 어느 포인트에 돈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자기가 명확해졌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는 크게 돈을 쓰지 않되, 성장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한 투자는 아끼지 않는다.
: 나를 어떤 상태에 놓을 것인가
소비 경험을 반복하며 취향이라는 게 축적되어 와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잘 안다. 식당을 예로 들어보자. 단순히 싸고 맛있다는 이유로 식당을 가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식사는 배를 채우기 위한 것도 있지만 식당이 손님에게 제공하는 애티튜드 역시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테리어라거나, 테이블 배치, 플레이팅, 직원들의 옷매무새 등 음식이라는 문화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식당을 좋아한다.
물론 지갑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매번 그렇게 좋은 식당만 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돈이 가치 있는 곳에 쓰여서 그만큼의 가치를 받기를 원한다. 단지 재미와 배 채우기를 위해 시간과 돈을 쓰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그 돈과 시간을 아껴서 집에서 요리를 한다. 여유롭게 차근차근 식사하는 게 좋다.
세상을 모험해 본 만큼 내 세상 역시 넓어진다. 소비도 마찬가지다. 돈도 써본 놈이 안다. 돈을 쓰는 것은 곧 경험을 한다는 것인데, 어떤 경험 속에 나를 둘 지에 대한 선택이 곧 소비 경험이다.
1만 원짜리 옷 10개를 살 바에는, 돈을 아껴서 10만 원짜리 옷 하나를 사는 게 좋다. 모든 것에서 고급일 필요는 없지만, 나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에게는 재화를 무작정 아끼기는 싫다. 그리고 그 투자가 모여 나를 완성할 테니 크게 아깝지도 않다.
: 존귀함을 내어주기
고급이 주는 가치는 소액의 물건들의 총합을 상회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들어간 정성과 태도가 있는 까닭이다. 가령 1만 원짜리 옷은 비닐에 포장해서 주지만, 10만 원짜리 옷은 각종 보호 백부 터 디테일한 인쇄가 들어간 정교한 종이박스에 넣어서 준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사람을 어떻게 존중하며 대하는지에 대한 매너를 배우는 게 좋다.
그런 지점들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 이걸 삶과 주변 사람들과 일에 접목시켜서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내가 좋다. 자존감은 나를 무작정 사랑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때 더 크게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그저 느끼는 것보다 실제로 실천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실현된다. 말뿐인 것 그 배후의 행동에서 보이는 디테일의 감동.
결국 사랑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을 상대에게 주고 싶은 것이긴 하다. 그게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 한정되면 속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물질을 넘어 보이는 본질이 중요하다. 새로 나온 한정판 무언가보다는 진심을 담은 손 편지, 꽃 한 송이, 물컵 밑의 티 코스터, 정돈된 커트러리..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이 무언가를 더 존귀하게 한다.
하지만 이것을 배우게 된 나 역시 소비를 통해 배운 것들이다. 존귀함을 받아봤고, 사랑을 받아봤기에 이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드는 것이다. 여행이 시작되고 호텔에 들어갔을 때 책상 한편에 놓인 지배인의 손 편지가 주는 감동 같은 것들 말이다. 단순히 무언가를 소비하는 것 이상의 감동은 이렇듯 타인을 사랑하고 귀하게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