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결국 유아론적인 흑백논리에서 중간값을 이해하는 과정이 아닐까.
자취를 시작하고 나를 책임지는 삶을 살며, 초반에는 소비를 극단적으로 절제했다. 유독 나에게만 극단적으로 아끼고, 나중에 있을 여행이나 보상을 생각하며 버티듯이 살아온 것 같다. 취향과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그 애매한 극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한 번 돈을 쓰기 시작하면 계속 쓰게 될지도 몰라'라는 두려움 안에 소비를 제한해 둔 것 같다. 이렇듯 과한 걱정은 내가 누구인지를 잊게 했다. 저 정도 걱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 멀리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무엇을 경계해 온 걸까.
: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정체되어 있던 것뿐
치열함을 위한 치열함이 아니었을까. 비전이나 동기부여가 지금처럼 안정적이지 않았다 보니 맹목적으로 열심히 산 것이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면서. 이제는 그 미래를 내가 한 발짝씩 만들고 걸어 나가야 한다는 현실을 안다.
그나마 대견스러운 건 소비 규칙을 정해놓고 선을 넘어가지 않는 법을 깨우친 것이다. 돈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이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단계 같다. 어떻게 나를 가꾸고 투자하고 예뻐져야 하는지를 말이다.
: 돈의 압박보다는 스스로를 먼저 가꾸기
내면의 강력한 동기와 정신적 강력함도 좋지만, 그에 상응하는 외면적인 굳건함 역시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순히 예쁘고 멋지고를 떠나서 외적인 매력 도와 내적인 단단함은 상호작용하며 내가 잘 버틸 수 있게끔 도와준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건강관리, 집을 내 취향대로 고치 기이다. 그동안은 되게 스파르타처럼 훈련하듯 살았다면 이제는 좀 그런 걸 내려놓았다. 진짜로 내가 편안해하고 좋아하는 환경을 가꾸어나가는 기쁨을 알게 됐다.
스스로 '나는 오만함을 경계해야 해'라는 압박을 너무 많이 줬던 것 같다. 단어의 정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구속한 과거의 나를 용서한다.
이렇게 내가 나 좋자고 꾸미고 돈도 투자하고 사는 건 오만함이 아니라 그냥 이게 좋은 건데. 좋은 거에 과도한 이유를 갖다 붙인 것 같다. 뭐라고 해야 하나, 공격받으면 자판기처럼 이유를 나불나불 대며 나를 지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소한 이유들이 날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는 없는데 말이지. 그냥 내가 나 자체일 수 있는 용기가 살짝 부족했나 보다. 귀여운 과거로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