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기에 용인되는 것들
20대의 젊은이가 30대, 40대 정도의 삶의 안정성을 가지는 건
그 사람이 특별한 거지, 모두가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젊기에 용인되는 것들은 결국 '실수해도 괜찮다'이다.
병아리가 닭이 될 때, 그 중간 애매한 지점이 가장 못나고 성격도 고약하다. 그건 닭이라는 종이 이상해서가 아니다. 생물학적 성숙을 위한 도약의 과정이다. 그보다 복잡하고 생각 많은 인간이라면 어떻겠나. 더하면 더했지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학업성취, 친구, 가족들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친구랑 멀어지면 굉장한 모멸감이 들고 마음이 쓰라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한 삶의 압박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불량한 짓도 하고, 탈선을 하고 반항할 수도 있다. 나는 이 과정이 몹시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단지 청년들보다 몇 년 더 삶을 경험한 어른들은 그들의 현재 성숙해진 관점에서 조언을 해준다.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들어보면 결국 그렇게 행동할 만한 이유들이 모두 존재한다.
다만 실수했다고 해서 마치 삶의 부정적 낙인을 찍은 것처럼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은 모두 각자만의 행동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양 극단이 아주 멀어서 '오우 쟤는 진짜 종잡을 수 없네'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의 스펙트럼은 X축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육각형 그래프인 사람도 있다. 이렇듯 모두 각자만의 삶이 있고 생각이 있다.
따라서 성장 역시 개인별로 다른 행동 양상을 지닌다. 어떤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이 신념은 무조건 옳아. 이게 내 삶의 방향성이야. 이건 절대적이야.'라고 확신을 하다가, 막상 살아보니 아님을 깨달으며 정신의 해부를 겪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모두에게 친절한 게 좋은 거야.'라고 생각했다가 본인이 생각한 친절이라는 것을 재정의하며 행동 패턴을 고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성장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젊음의 속성은 불온전함이라, 닭과 병아리 중간의 우매한 닭 병아리들의 무수한 토론과 싸움과 사랑으로 일구어진다. 젊음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건 결과가 아니라 그냥 그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본질 같다. 모두가 다 멋진 닭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닭 병아리에 영원히 갇혀있을 수도 있지.
그러니 젊음을 사랑하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아름다운 한때, 아름다운 외모의 속성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라는 말 같다. 실수해도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용인되는, 그게 젊음 아닐까. 실수해도 윙크 한 번 하면서 질책받지 않을 특권이 곧 젊음 같다. 어차피 이 실수와 흔들림을 통해 닭이 될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젊음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비슷한 것 같다.
우매한 자들이 모여 우매한 토론을 벌여도 그게 용인되는 범주 내에 있는 것.
완전하기에 함께하는 게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 존재하기에 마음 맞춰 걸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