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살아있는 닭!
우선, 이 작품에 대한 어떠한 배경지식 없이
오직 느낀 바 그대로 서술할 것임을 서두에 밝힌다.
감히 살아있는 닭!
작품의 제목인 치킨맨부터 흥미로운 사고를 자극한다. 노인의 저 황당한 표정을 보라. ‘감히’라는 말을 덧붙여가면서까지 꼿꼿이 살아 숨 쉬는 저 암탉을.
내가 감히라는 말을 덧붙인 경위는 이러하다.
우리네 삶의 영위를 책임지는 식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만이 가득하다. 생명의 죽음을 통해 인간은 삶을 살아간다. 삶과 죽음이 식탁 위에 공존할 수 없는 법이다. 닭고기 스튜, 샐러드, 신선한 과일. 그 어느 것 하나 살아있는 것이란 없다. 다만 신선하다는 착각 속에 생명력을 느낄 뿐이다. 그런데 저 닭은 ‘식탁의 룰‘을 완전히 어긴 채 똑바로 노인을 쳐다보고 있다.
말하자면 에너지 소비자인 인간과 소비 원인 닭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는 인간과, 죽어야 하는 처형대 위에서 살아있는 닭. 어쩌면 닭이 저 노인보다 더 지대한 생명력을 지닌 것 같다. 생식능력을 다하고 쇠퇴하는 노인, 그리고 알을 낳음으로써 생명을 양산할 수 있는 암탉의 대비 말이다.
인간을 경계하고 그 앞에서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해야 할 닭은 정작 평온한 자세로 바라볼 뿐이다. 그에 비해 노인을 보아라. 본인 몸의 5분의 1도 안될 것 같은 닭을 보고 예측 불가능한 다음 행동을 불안해하는 몸짓을. 생명력이 넘쳐남은 어쩌면 예측 불가능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
의자와 식탁 모두 초록색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둘은 결국 저 초록색 단상 위에서 마주했다. 죽어야 하는 곳 위에서 산 닭, 그리고 살아감을 위한 식탁의자에 앉은 죽음에 가까워진 노인. 노인은 초록이라는 단상 위에서 자신과 대비되는 기세 좋은 암탉을 보며 자연히 죽음을 마주했으리라.
식탁과 의자를 지지하는 메테리얼이 다른 것도 눈에 띄었다. 생명이 있다가 날아간 나무, 애초부터 생명이라고는 없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틸. 식탁을 지지하는 나무다리는 무생물에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저 노인의 다리보다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삶은 그 자체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저 암탉마저 식탁 위에 닭고기로 올라가거나, 자연사를 하겠지. 그리고 누군가의 생명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의 죽음은 다른 것의 지지대가 되어주거나 생명이 되어주는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인간의 죽음은 무수한 슬픔과 인공적 공간을 조성한다. 무덤이나, 분향소처럼 말이다. 닭의 생명과 죽음은 우리에게 일말의 에너지원이 되어줄지라도, 인간의 죽음은 슬픔과 애도 그 이상 무엇을 낳게 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이 제1의 포식자의 생을 끝내고 남은 건 하위 생물들에 대한 존중과 감사가 아니라 그저 슬픔과 덧없음, 그리고 몇십 년간의 기억의 조각과 애도 아닐까.
똑같이 초록의 지구 위에서 태어나서 토양 밑으로 갈 텐데.
짐승과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마치 피라미드 계급처럼 살다가 결국은 한 줌 흙이 되는데, 우리의 죽음은 어째 에너지원과 동력이 아닌 슬픔만을 낳는가. 우리가 밟고 있는 이 토양은 무수한 슬픔으로 이루어진 단상일까?
인간은 무수한 생명을 소비하고, 사랑하고, 즐기고 결국 다 똑같아지는데. 저 식탁과 의자라는 바운더리가 참 덧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