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해야하는 ‘반드시’가 없는 사람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가치관이 재정립되며 드는 여러 권태가 있다. 매번 다니던 학교, 버스, 카페가 더 이상 충족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 말이다. 중요한 건 미래를 직조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관조한다는 점이다. 감정적 요동이 거의 없는 상태. 2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시기를 겪은 기억이 난다.
난 특별한 목표가 없다. 과정만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목표 없이 그냥 사는 게 좋다. 내가 말하는 목표란 가령, '구글에서 촉망받는 디자이너', '픽사에 들어간 전설의 크리에이터', '월 1억은 우습게 버는 사람' 이런 것들이다. 그런 거에 단 한 번도 동기부여를 느껴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해보세요, 이런 삶을 살아보세요 하는 얘기를 가끔 (학교든, 강연이든, 인터넷이든) 주워들으면 열정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 건 남들의 기대에 발맞춰 따라가는 인간상이 아니었으니까.
옛날 일이 잠시 생각나는데, 그러니까 나는 서울대학교를 지원할 만큼 열심히 노력했고 공부도 그림도 잘 하던 사람이었다. 근데 이제 아쉽게 합격까지 간 건 아닌데, 과거에 그 욕망에 사로잡혀서 SNU라는 간판만을 보고 열정 비슷한 걸 쏟아내려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원한 건 어느 곳에서든 착실히 내가 원하는 바를 내며 사는 사람이었는데 마치 SNU에 들어가야만 그 행복이 인정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였던 기억이 난다. '난 여기 들어가야만 해' 하는 채찍질을 한 것이다. 행복은 조건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노력과 성패, 그리고 현재의 모습 모두를 이제는 수용한다. 그런 욕망도 부려봐야 중용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지 뭐.
그러니, 인생 하루하루를 저 멀리 있는 비전만 꽁무니 쫓듯이 살아가는 건 안 한다. 그냥 '이런 방향성이 좋겠어'라는 나침반 만 있고, 중간에서 플랜을 무수히 바꾸며 살아간다. 책을 쓰며 나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자는 방향성만 있고, 특별히 '이 주제여야만 해'라는 강박은 없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말하자면 그렇다. 본질은 출판업을 하는 나가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를 하는 나가 지금으로서 더 중요한 본질이니까. 중앙의 심지가 무엇인 지 알면 겉포장이 무엇인들 어떠랴.
그러니까 직업적인 구애도 받고 싶지 않은 거다. 다만 주변 인물들이 '그래서 넌 뭘 하고 싶은 데'라고 물어보면 지금 당장 뭘 하고 싶은 지만 이야기하고 만다. 내 비전이나 삶의 방향성을 꼭 모두에게 공유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나에 대해 알아서 생각하도록 하는 여백은 필수불가결하다. 개중에 진짜로 방향성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럴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이 이야기한다.
성공의 가시적인 증거들을 억지로 꾸며내려는 게 아니다.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부풀리기도 싫고, 그렇게 사는건 나에게 무의미하다. 그건 성과를 위한 성과다. 증거 형성을 위한 알리바이를 꼭 만들어야만 증명된다면, 그런 가치를 원하는 집단과 억지로 관계를 맺지 않으련다.
어쨌든 방향성은 정했으니, 이제 슬슬 나아가며 발자취를 만들어가면 결국엔 '아하, 저런 사람인가 보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설명해 봐야 관념적으로만 다가올 것이다. 매일매일이 모여 무수한 점을 찍어야 직선이 된다. 파편적인 점 몇 개를 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그 '직선'은 보이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것뿐이겠다.
나를 무너뜨리는 건 세계가 아니라, 세계가 날 무너뜨린다고 착각하는 나 자신이다.
쉬엄쉬엄, 차근차근 차분하게 압박 속에서 살지 않고 충만하게 나아가는 게 좋겠다. 성과나 업적을 빨리 만드는 건 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목적을 향한 끝없는 채찍질보다 하루하루 과정에서의 충실함을 택하는 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