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려 하면 빛을 잃는다

by 나경

디자인이 벅차지기 시작한 건 창작자에서 피평가자가 된 순간부터였다.

나는 빛나려 했기 때문에 잠시 빛을 잃었다.




디자인을 나를 설명하거나 증명하는 방패막으로 쓴 건 3학년때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디자인 철학이나 룰이랄 것도 없이 디자인이라는 언어 안에서 재미있게 노는 아이와 같았다. 레퍼런스도 최소한으로만 참고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대로 전달하는 유쾌한 이야기꾼이었다. 3학년이 되자 교수님도, 동기들도 분주해지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유야무야 움직였다.


그 미래라는 건 다름 아닌 취업이었다. 다들 '더, 더, 더 잘해야 해', '더 좋은 성과로 증명해야 해'라는 압박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보다 더 뛰어난 툴 실력을 가지고, 더 멋져 보이는 성과물들을 가져오는 동료들을 보며 나 역시 저렇게 해야 하는 무언의 압박에 시달렸다. 그렇게 더 잘 보이려고 꾸민 디자인 이후에는 성취감이 아닌 말 못 할 공허감이 맴돌았다.


이전까지는 좀 다른 친구들보다 어떤 것이 부족해 보여도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내 식대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가더라도 못했다는 평가를 듣지도 않았다. 좀 못나 보일 까봐, 비교되어 보일까 봐 걱정한 건 불안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불안을 상쇄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남들에 비해 못나 보이지 않을 만한 방패가. 타인이 내 디자인을 손가락질해도 '아니야 이건 이래서 이렇게 나온 것뿐이야'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디자인을 성역화했다.


디자인 결과물 속의 의도를 파악하고 눈에 보이는 그 뒤의 것을 탐구하며 경탄했다. 눈에 보이는 걸로만 따지면 대단히 멋지고 존경할 만한 디자인이라는 건 손에 꼽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멋지게 하는 효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성이라는 철학으로 우월성을 갖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것 배후의 '우와'라고 찬사를 받을 만한 깊이 있는 사고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허무맹랑한 우월성의 덮개를 덮어서 얻은 건 다름 아닌 배타성이었다. 남들보다 뛰어나야 했기 때문에, 더 높은 성과를 가져야 했기 때문에 어느새 고슴도치가 되어 스스로를 가시 속에 고립시켰다. 내가 아니면 틀리거나 못나야 했어야 했던 어리석은 생각은 나를 더 깊은 불안으로 안내했다.




비판이나 토론이라는 껍데기 뒤에 숨어 값싼 우월감을 가졌을 때,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건 나 자신이었다. 결과물, 혹은 나라는 사람 그 자체.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울처럼 반사되어 나를 다시 비췄으니 말이다. 진짜 내 본모습을 보기 싫어했다. 내가 생각했던 나는 '남들보다 뒤처질지도 모르는 나'였던 까닭이다.


그때부턴가 뭔가 랩탑을 켜서 창작하는 게 더 이상 재미가 없고 압박으로 다가왔다. 일종의 백지공포증이었던 것 같다. 선 하나를 긋는 것뿐인데 압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가 볼 지도 몰라, 이거 포트폴리오에 넣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을까, 동기들이 깔보는 거 아닌가, 교수님이 핀잔주면 뭐라고 해야 하지 하며 말이다. 그래서 자꾸 디자인에 논리성이나 철학을 부여했다. 그 철옹성과 철갑옷을 둘러싸야만 내가 안전할 것 같았다.


'저는 이런 철학을 갖고 있어요'. '이건 이렇게 되어야 해요' 하는 게 틀린 건 아니다. 그 말이 나온 경위가 더 중요하다. 내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디자인을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그저 이해만 받고 싶고 사랑만 받고 싶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디자인을 통해 의도까지 증명해야 내 진가를 알아봐 줄 것 같다는 이상한 착각을 했다. 사실 그건 진실된 의도라기보다는 잘 보이기 위한 면피에 가까웠는데 말이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지에만 집중하면 어그러지고 자기중심적인 디자인이 되더라. 하지만 그런 아이 같은 시기가 있었기에 성장을 거치는 게 당연한 것 같다. 세계를 구축하는 시기에는 내가 뭘 믿고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가를 명확히 해야 하니까 말이다. 다만 그게 절대주의 쪽으로 기운 게 패착이었다.


이제는 "보세요, 제가 이렇게 생각해서 이렇게 만들었어요" 쪽에서, "이걸 보고 당신은 어떻게 느끼세요?"로 작업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의도를 하나하나 계산해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철옹성 디자인은 거두기로 했다. 대신 이 결과물을 보는 사람이 이걸 느끼면 좋겠다, 이런 감정을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역산하고 반추하면서 의도를 생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증명하기 위함이 아닌,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의도. 그러니 의도라는 건 불도저같이 밀어 나오는 창의력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공유하고 선물하고 싶은 호감에서 비롯되는 존중의 가치 같다.


누구보다 빛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인정투쟁에서 내가 가진 빛을 타인에게 나누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전환하고 나서야 비로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표현의 기술로만 보면 늘 평가의 잣대가 생기기 마련이다. 디자인은 소통의 시각언어이지, 기술의 경연이 아닌 까닭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문법이나 말의 정확성보다는 온도로 전해지듯이, 디자인으로 말하는 건 결국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디자인은 결국 감정을 번역하는 일이다. 디자인을 통해 감정을 감각적으로 세련되게 전달하는 것. 사람들의 심미성을 자극하여 정보나 심상을 전달하는 번역가. 그게 디자이너의 소명 아닐까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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