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방구석에서 영어 연마를?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어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벌벌 떨었다. 문법이 이거였나 저거였나 하면서 머릿속에서 언어를 스스로 제한했다. 텍스트로 해야 할 말이 있으면 GPT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줄 읊은 뒤에 영어로 번역해 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말을 하고 싶은 심상은 떠오르는데, 단어만 띄엄띄엄 배열할 줄만 알지, 문장은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여러 갖은 방법들을 보고 따라 해 봤다. 가령 쉐도잉이랄지, 미드를 본다던지 사람들이 흔히 추천하는 방법들 말이다. 일단 머리에 뭐라도 넣어봐야 할 것 같아서 아이엘츠 학원도 잠시 등록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방법들은 전부 폐기했다. 그럼에도 난 영어 능통자다.
그러나 이 냄비근성의, 남이 하라고 억지로 시키는 건 죽어도 하기 싫어하는 내 특성상 학원이나 영상 시청과 같은 수동적인 방법으로는 도무지 영어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말 그대로 해야 해서 하는 말이지, 나의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외에 나가서 살아보고는 싶고, 하고 싶은 말은 많고, 근데 입은 안 떨어지고. 제법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결국 내 손에 남은 거라고는 누가 시켜서 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라 영어로 누군가와 교류하고 싶다는 욕망만 남은 상태였다. 그때 나는 매일매일 블로그를 쓰는 습관이 있었고, 아시다시피 브런치에서 작가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니 내게 맞는 방법은 곧 '내 결대로 하고 싶은 말 하기'였다.
영어적 사고 갖추기
그래서 그날부터 영어 문법이고 단어고, 멋있고 유창해 보이는 스킬들은 내려놓은 채 블로그에 매일 쓰는 일기를 영어로 쓰기 시작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글을 써보고, 막히는 단어의 경우에는 사전을 찾아가며 감정을 영어로 변환했다. 한글에서 영어로 번역기를 통해 겨우 소통하던 내가, 능동적으로 날것의 나를 영어로 꺼낸 첫 순간이었다.
역시 처음은 처음이다. 역설하고 싶은 감정의 깊이에 비해 영어 속도가 처참하게 따라가지 않았다. 처음에 많이 고민했던 부분은 한국어로 드는 생각을 영어로 직역해서 바꿔야 하나, 아니면 좀 부족하더라도 영어로 최대한 써봐야 하나 하는 것들이었다. 누군가가 이런 고민을 한다면, 전자를 추천하겠다. 분명 처음에는 '캬 어쩜 이리 완벽하게도 내가 하고 싶은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니!' 라며 감탄을 자아낼 것이다.
내가 밝혀낸 언어의 특징이 하나 있다. 어떤 언어든 결국 그건 감정을 전달하는 하나의 보자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언어의 특성이나 감정선을 잘 몰라서 고운 보자기의 형태는 아닐 것이다. 듣기에 무례하게 들리거나 실례를 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겉은 성인인데 영어 실력은 어린이인걸.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왔잖나.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고,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걸 굳이 곡해해서 손가락질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무례한 것이다.
그래서 일기를 무작정 매일 써 내려가며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한국어는 어떤 방식으로 말을 배열해도 말이 되는데, 영어는 틀 안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어 문법이라는 아주 큰 장애물이 있다. 난 그걸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문장 구성이라는 틀만 있고, 거기에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감정을 틀에 맞게 말하면 된다. 실수를 하든 말든 일단 써보는 게 중요하다. 일단 다 써보고 GPT에게 내 일기를 같이 읽어보며 영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달라고 했다.
GPT야 피드백 말고 칭찬해 봐
흔히들 많이 영어에서 힘들어하는 부분이 '문법이 계속 헷갈려요'다. 이해한다. 난 이런 언어사용과 같은 일상적인 일에서 지적을 받으면 주눅 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GPT가 냉정히 내놓는 일기에 대한 후속 피드백을 듣더라도 열심히 문법오류를 고친다거나 다시 써보거나 하는 노력을 가하지 않았다. 수능 공부하듯이 언어를 하면 지쳐 나가떨어질 게 눈에 선했다. 그래서 그 읽기 싫은 냉정한 평가들이나 문법 오류를 고친 표의 경우에는 휘리릭 읽어보기만 하고 칭찬을 많이 해달라고 했다. '어때? 나 일기 쓴 지 오늘로 5일 차인데 초반에 비해 많이 나아지지 않았어?'라면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진법 덩어리의 인공지능이 건네는 칭찬의 효과는 굉장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어깨는 으쓱으쓱 내일의 일기 쓰는 게 기대되는 나였다. 그리고 그 GPT 녀석은 결국 칭찬을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며 한두 마디의 조언을 섞었다. 난 그 기분 좋은 조언을 받아들이고 내일의 일기를 써내라고 또 다른 칭찬을 받는 게 기대됐다.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일기에서 부족했던 문장 몇 개를 골라와서 한두 번 고쳐보기도 했다. 말 그대로 기분이 좋아서 한 일이었는데 '너, 정말 **핵심**을 간파했어!'라 들으니 입꼬리가 씩 승천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느껴지는 한마디랄지. 그렇게 나는 매일같이 일기를 썼다.
스피킹은 다르다
그리로부터 2주 정도 지난 시점이었나, 뭔가 이제는 원어민과 말하기에도 도전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이전에 종종 해보던 전화영어에 다시 도전했다. 미국 원어민과 매일 20분씩 통화하는 루틴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프리토킹이 두려웠다. 지금까지는 쓰기만 해 봤고, 그마저도 영단어도 찾아가면서 오랜 시간을 들여 쓴 글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완전한 프리토킹이 어려운 사용자들을 위해 아주 많은 세션과 토픽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에 원하는 토픽을 선택해서 질문 내용이 미리 주어져서 연습도 해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그 질문들을 노트에 쓴 후에 답변을 영어로 툭툭 쓰고 GPT와 이야기를 했다.
문법 오류라거나 단어의 다양성을 폭넓게 알려주는 인공지능 녀석은 나의 충실한 서포터가 됐다. 전화영어가 시작되면 여러 가지 예상밖의 질문들이 날아온다. 어쩔 수 없다. 정면돌파 해야 한다. 아무리 멋진 스크립트를 써놓아도 밑천은 드러나기 마련. 그러니 그 순간을 즐기면서 교류의 즐거움을 느끼는 데 충실했다. 결국 난 해외에 나가 타인과 교류하고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 거였으니 그 따뜻한 시간이 내게는 소중했다. 문법 오류도 적고,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게 되는 건 결국 시간문제다.
언어는 그저 심상 전달 보자기
오히려 우린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서 그 사람들과 나와의 간극을 견뎌내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잠깐 이거 틀린 거 아니야?'를 깡그리 무시하는 게 곧 영어 능통자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참을 수 없는 내 가벼운 온도의 영어를 감내해야 한다.
표현하고 싶은 멋진 심상이 있어도 마땅히 표현할 단어나 문법이 생각나지 않으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 말해보는 게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더 좋은 표현, 더 좋은 문장을 찾아 떠나는 건 나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생각해 보면 단순하다. 영어 원어민이 '명징하다'는 심상을 표현하고 싶은데 한국어 표현을 모른다고 하자. 그럼 '오 그거 진짜 확실해' 이런 식으로 표현하게 될 거다. 한 외국인이 당신에게 '상황 지금.. 그거.. 명징해요.' 이러면 진짜 희한하게 들리지 않겠나? 분명 형태는 한국어인데, 도무지 의도가 잡히지 않는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마찬가지다.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글쓰기든 전화영어든 한 세션이 종료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단어나 문법 정확도와 같은 멋진 포장지에 현혹되는 순간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언어의 본질은 휘발된다. 그러니 무시하라! 당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의심을 철저히 무시하라!
알 게 뭐야 난 말을 할 거고 알아듣는 건 상대의 몫이다라고 생각하라. 상대가 알아들을지 말지에 대한 유창성을 따질 만한 레벨이라면, 문법에 대한 의심은 특별히 들지 않는 상태일 테니 말이다. 본인이 한국인, 한국어 사용자였다는 과거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웃어넘길 때 비로소 영어는 내 친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