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슬픔의 틈을 통해 들어온다
친한 친구를 2월에 보고 오랜만에 약속을 잡아 만났다. 우리는 대학생활의 종점을 앞두고 휴학이라는 선택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서로 삶이라는 고통은 인내하느라 만나기 어려웠다. 재미있는 점은 서로의 공백기를 알고 있음에도 서로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린 몸도, 마음도 변한 채 다시 만났다. 2월과는 사뭇 비슷한 온도와 복장과 웃음소리와 말투였지만 지난했던 아홉 달 동안의 고생을 대변하듯 대화 주제와 의식은 굉장한 성장을 이룬 채 재회했다. 8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하며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건 단 한 문장으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에 충분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삶에서 존재하는 고통이 일이라거나 인간관계라는 단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만 발생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살기 편하겠냐만은,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언제 어디서 슬픔과 우울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지난 몇 달간 신에게 슬픔이 끝나는 시점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끝나는 지를 간절히 묻고 싶었다. 이 아픔이 종식되는 날짜라도 알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종점이 없는 기차를 편도 티켓으로 끊은 것 같은 슬픔이 이어졌기에, 마음의 등대가 간절히 필요했다.
그러나 삶이란 미래의 어느 시점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닌 현재의 발걸음이 모여 완성되는 것이었다. 슬픔이 내 곁에 있을지언정, 슬픔이라는 덩어리는 나의 존재를 위협할 수 없다. 슬픔과 나의 존재는 합치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동안 스스로를 슬픔의 덩어리인 것으로 착각한 셈이다. 투정도 많이 부렸다. '나는 왜'라는 물음을 읊조리며 세상과 내 눈앞의 현실을 제법 미워했다. 애초부터 슬픔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왜 그런가'라는 답도 없는 고민을 계속 되뇌었다. 이 슬픔을 타파할 뾰족한 수가 있을 것이라 착각한 것이었다.
'난 왜 이렇게 슬퍼야 하나'에 대한 고민을 담론 주제로 상정하여 이를 타파하고자 한 어리석은 물음표의 갈고리는 스스로를 찔렀다. 슬픔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방패막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허무맹랑한 논리를 가져와서 '난 이래서 슬픈 거야'라며 자조했다. 그 질문이 남긴 물음표의 답이 갈고리가 되어 스스로를 찌르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이렇게 많이 아프다 보니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한 많은 시도들을 했다. 매일 일기를 쓴다던가, 일기에 쓸 콘텐츠를 채우기 위해 서울을 돌아다녔다. 여행도 가보고, 마음이 아픈 걸 쳐다보기가 힘들어서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생활습관도 바꿨다. '이렇게 하면 슬픔이 없어지는 걸까?'라며 내 삶의 모든 디테일한 면을 되돌아보고 개선했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걸어내며 하루하루를 버텨냈고 살아냈다. 슬픔이 마음에 낸 상흔 사이로 빛이 서서히 들어왔다. 슬픔은 역설적으로 삶의 빛을 가져와서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너무너무 아팠다. 그러나 그만큼 나의 땅이 넓어졌다.
친구가 내게 한 말이기도 하고, 내가 친구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아홉 달을 거쳐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상봉한 오늘의 우리는 웃음 뒤에 쓰디쓴 흉터를 지닌 후였다. 서로의 슬픔이 어땠냐를 묻기보다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행복하고 싶은 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과거 이야기는 얼마든지 꺼낼 수 있지만 결국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 이상, 과거가 아닌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는 친구의 따스함이 참으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