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고등학교 때의 나는 스스로에게 입시생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그 타이틀 안에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그때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랄 것이 곧 입시여서 이걸 해결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다른 길로도 새면 어그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애도, 노는 것도 마다하고 미술 중심으로 살았다. 대학생이 되기 전의 나는 가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목표를 손에 거머쥐기 전까지의 나는 ‘이 악물고 앞만 보고 달려 나가야만 하는 존재’ 였으므로.
어쩌면 그 달려 나가고 있다는 가능성의 상태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달려 나간다는 피상의 껍데기는 뒤집어썼고, 목표는 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입시 내내 현재의 상태는 고려하지 않고 오만하게 굴었다. 오만이라는 말을 덧붙인 경위는 이러하다. 사랑이라거나 즐거움 같은 행복함에 젖어들면 내가 설정해 놓은 ‘앞만 보고 가고 있다’는 껍데기가 벗겨질지도 모르므로 그 길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실 앞으로 가는 척을 하고 있던 거지, 실제로 앞으로 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진일보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목표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을뿐더러 내 하찮은 현재의 모습이 드러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랑 달라. 연애나 노는 건 안 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희생할 줄 아는 괜찮은 입시생이야’라고 생각했다. 즉, 행복이란 스스로에게 허락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즐거움은 곧 죄악이었다. 행여나 행복하거나 즐겁기라도 한다면 입시생으로서의 본분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웠다. 사실 본질은 그렇게 보이냐 마냐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입시를 대하 고있느냐인데 말이다.
난 이와 같은 삶의 패턴을 종종 마주한다. 인생에서 당장 맞닥뜨린 가장 큰 파도가 절대적인 인생의 방향표인 양 행동한다. 어차피 파도는 지나가기 마련인데, 파도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까를 고민한다. 진짜 고민해야 하는 건 파도가 아니라 모래사장 위에 어떻게 서있을까인데. 나로부터 행복을 갈취해 낸 후에,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넌 이걸 누릴 자격 따위 없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인생 전체가 파도의 연속인데 파도 후에 비로소 원하던 궁극의 고요한 물결이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렇게 생각만 많이 하면서 모든 걸 회피한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오늘 할 일을 미룬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앞을 진정으로 헤쳐나가는 건 극심한 불안이 함께하는 일이다. 완벽 따위는 없고 그냥 이 길이 곧 길이겠거니 생각하며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한다. 나는 지금껏 현재의 불안함 그 자체와 함께 나를 믿고 걸어 나가기보다 ‘미래의 이럴지도 모르는 나‘를 생각하며 그에 딸려오는 시간과 노력을 감내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상상은 1초 만에라도 꿈속에 데려다주지만, 현실은 얼마큼 얼마나 해내야 원하던 곳에 갈지 모르니까. 그리고 원하던 완벽 따위는 현실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오늘을 버티듯이 살아내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게 딱히 없던 것이다.
목표가 없어도, 심지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나는 사랑받을 만하고 행복할 자격이 있음이 충분함을 이제는 안다.
파도에 맞서 싸워 문제를 이겨먹으려 하지 말고, 파도에 몸을 오롯이 맡기고 떠내려감이 곧 인생임을 이제야 하나 둘 깨닫는다. 완벽 따위는 존재하지 않듯 실패 역시 내가 그렇게 정의 내렸을 뿐, 실패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인생의 대부분은 성패가 아니라 그러함이었다. 그렇게 됨. 그러함. 딱 그 정도다.
매 순간을 파도 앞에서 이 악물고 버텨내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모두 흘러가는 게 곧 내가 내린 결론이다. 결국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 된다. 그런데 보통은 내가 생각한 최악의 일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으며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진짜 최악은 지금 현실을 살지 않고 손가락만 쪽쪽 빨며 ‘난 그렇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해볼지도 몰라’ 하며 상상의 태반 안에서 호접몽을 꾸는 그 자체이다. 파도를 두려워하지 마라. 파도는 문제가 아니고 내 친구이며 나를 이끌어줄 운명이고 내 친구다. 내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있는 지는 생각보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느냐도, 어디로 가고있는 지도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매 순간을 소중히 감사하게 살아가려는 태도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