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예술의 차이

그리고 디자인 사대주의의 위험성

by 나경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디자인은 산업혁명 시대에 영국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태동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디자인이란 전 세계에 걸쳐 사용하는 상업적이고 시각적인 문제해결 도구로서, 특정 국가에 온전히 귀속되어야 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입장을 서두에 밝힌다.




산업과 기업이 발전할 때를 보면 늘 디자인을 필요로 한다. 대중들로부터 호감을 사고 싶기도 하고, 문자적인 홍보 그 이상의 이미지를 원하는 까닭이다. 여기서 디자인이란 기업이나 개인의 니즈를 충족하거나, 혹은 특정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디자인과 예술의 차이

그럼 디자인과 예술은 무엇이 다르냐, 일단 예술은 이미지 그 자체만으로 수요가 있고 특정 메시지가 분야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메시지 전달의 의도가 있을 때도 있지만 그것이 상업적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온전한 사고에 기초한다. 반면에 디자인이란 이미지(즉 화지/아트보드) 위에 정보값이나 문자가 추가된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으며 그것이 문자적으로 이미지 위에 드러나며 상업성을 띠는 것이 곧 디자인이다.


이 상업성이라는 단어 안에는 여러 함의를 넣을 수 있다. 제일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상업성의 특징은 타인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디자이너와 이해관계자, 디자이너와 대중, 혹은 디자이너와 팀원 디자이너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개인이 어떻게 사고하고 역량이 얼마나 뛰어나냐 보다 일단 경청을 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팀이 돌아가듯 디자인 역시 협업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개인의 탁월성의 증명이 아닌 대중과 이해관계자들을 상대하는 분야이기에 의견에 대한 수용성과 소통능력이 더없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건 이해관계자를 설득하여 디자이너 개인의 뜻대로 시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예술적 안목을 토대로 이해관계자를 '이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 통칭하는 비극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용의 이유를 떠올려봤을 때 '본인의 방식대로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라는 말에 앞서, '이 일을 통해 협업하여 상업을 돕기 위함'에 기초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성을 거세해서 을의 입장을 취하라는 말이 아니다. 최소한 상호 간의 평등성을 갖춰야 하지 않겠냐는 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가가 아닌 까닭이다.



소통 능력 / 의견 격차 조율력

디자이너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툴을 잘 다루는 것, 디자인적 지식을 알고 있는 것 등 그 무엇보다 앞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소통능력이다. 좀 더 자세히 풀어서 말하자면 타인과 나는 다른 의견을 가졌음을 인정하고 이를 조율해 가는 능력을 말한다. 여기엔 예술적 콧대 높음도, 학벌도, 디자인 전공유무도 근거가 될 힘이 아주 약하다. 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넓은 수용성과 그에 맞춰서 변화할 수 있는 행동력 등이 요구된다. 테이블 위에서 우월성을 토대로 협상을 시작하면 피를 볼 수밖에 없다. 피를 내서라도 그러한 디자인적 성과를(커리어나 포트폴리오에 추가할 만한 성취를 이른다) 타인의 돈이나 상업을 통해 취하고자 하는 욕심이 든다면 그 능력 여하에 따라 개인작업을 하면 된다.


언제 한 번 모 회사 소속 디자이너의 푸념을 들었던 적이 있다. 본인은 글로벌한 마케팅이나 디자인을 해서 좀 더 공격적이고 실험적인 그래픽을 통해 브랜드를 발전시키고 싶다는 입장이었고, 회사 경영진은 이런 빠른 시대적 흐름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영어를 왜 써야 하느냐 한다던가 말이다. 그렇게 입장이 확고한 경영진을 설득하거나 의견 격차를 줄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디자인은 시각적인 확장성보다는 문제해결의 도구라고 보는 수단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경영진이 긴 흐름을 통해 브랜드를 일구어왔다면 그걸 단숨에 바꿔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것도 단지 예쁨이나 디자이너의 소견을 위해서.


영어의 사용과 글로벌 마케팅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영진이라면? 난 오히려 그런 차별성을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두고 싶다. 영어를 써야만, 트렌디함을 갖춰야만 브랜드가 성장하는 시대가 아닌데 왜 굳이 이쪽에 집착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디자이너는 문제해결을 같이 하자고 고용된 사람이지, 개인 실험실을 갖기 위해 고용된 건 아닌 까닭이다. 변화를 한 번에 가져오기보다 조금씩 디자인의 색을 넣되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르면서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싶었다.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의 클래식을 디자이너가 만들어주면 될 일이다.



영어와 트렌디한 그래픽은 늘 유효한가?

그 디자이너가 그렇게 변화라거나 글로벌을 토로할 때 솔직히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의견을 조율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글로벌을 이유로 꼭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갖다 바치거나 트렌디함을 가져다주는 건 한국 사람의 우매한 생각일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 확고한 아이덴티티 없이 영어와 트렌디가 판을 치는 글로벌 시장에서 먹힐까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거야 말로 경영진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다분한 선택이 아닐까?


최근 글로벌시장에서 소위 '먹히는' 한국의 디자인을 들여다보면 영어가 아니고 한글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더 유효할 때가 많다. 내가 그 디자이너였다면 한글 타이포그래피 하는 법을 배워서 경영진과 협업하고 소통했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한 브랜드 이미지의 변화가 한 일면에 갇혀있을지도 몰랐다고 깨닫고 어쩌면 내가 가장 우매한 방향성만 고집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결국 문제 해결의 도구이지, 내 의견이 맞음을 관철하는 지휘봉이 아닌 까닭이다. A안을 냈지만 경영진은 아니라고 하고, 나는 여전히 A 안이 좋고 하고 싶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건 디자인 방식 관성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혹은 개인의 취향을 밀어붙이고 싶다거나. 근데 그렇게 하고 싶으면 개인 작업을 해서 그걸로 인정받으면 된다.)


한글의 특수성은 실로 대단해서 타이포그래피가 영어보다 더 어렵고, 시안이 많지 않으며 함부로 손대기 굉장히 까다롭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디자이너가 전통적인 그래픽 디자인을 하면서 한글을 쓰지 않으려는 게 좀 의심스러웠다. 그 디자이너에게 '영어가 관성이 된 건 아니고?'라고 무례를 저지르기 어려워서 함구한 것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말이 있듯 한국 디자이너의 글로벌 진출에서 한글과 전통을 거세한다면 뭐가 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디자이너의 특수성과 예술성, 넘보지 못할 완성도로 인정받을 수는 있긴 한데 굳이 꼭 그것만이 정답일까. 무엇보다 영어권 외국인들한테 왜 영어로만 인정을 받아야 하나? 한국인은 그들에게 영원한 이방인일 텐데 말이다. 유행을 이끌고 브랜드를 확장하고 창조해 내는 디자이너의 직업윤리가 과연 '글로벌 트렌드 따라가기'에 그치는 게 맞을까 질문하고 싶다. 그리고 '진짜로 당신이 하고 싶은 디자인과, 팀이 가야 하는 방향성과 합치하느냐'라고 묻고 싶다. 개인적 취향은 취향일 뿐 의견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쁘다는 말을 앞세워 디자인을 제작하고 휘발해야 하는 게 아니라 목적이 있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 하는 집단인 까닭이다.



스타일은 본질 이후의 것

본질을 감추는 디자인은 오래 못 가고, 집단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디자인만 시간이 쌓인다. 그렇게 쌓인 디자인은 곧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된다. 스타일과 트렌디함은 본질을 언제까지고 포장해 줄 수 없다.


가장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정석의 방식이 어쩌면 돌파구가 될 때도 많다. 이건 단순히 '해왔던 것을 다 버리고 새로이 도전해라'는 말이 아니다. 성장을 위해서는 불편한 자리에 제 발로 서있어야 한다. 편안한 방석과 가시방석에서 가시방석을 택해야 지평이 넓어지고 성장을 이룩하고 인정을 끌어들일 수 있다.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스타일 대로만 돌파하려고 디자인에 임하는 거라면 그거야말로 가장 대체되기 쉬운 길로 가는 꼴이 아닐까. 디자이너는 고유성이 뛰어난 예술가가 아니다. 디자인은 어쩌면 수행과 같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경청하며 변화를 받아들이고, 가끔은 조율하고 방향성을 제안하는 것. 그리고 유사시에는 능력과 지식의 발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요구에 맞게 시각적 문제해결력을 넓히려고 하는 것.


관성은 나를 언제까지고 책임져주지 않는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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