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려고 하면 다친다
일기를 주기적으로 쓰기 시작하던 첫 시점은 중학생이었다. 으레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그때의 나는 마음속이 혼란함으로 가득했다. 바람이 이는 것만 봐도 즐겁다가 슬퍼지곤 했다. 그렇게 지난한 하루를 마무리한 후 저녁이 된 나의 방에서는 다양한 일이 벌어졌다. 여름밤에는 창문을 활짝 열면 달빛이 들어와서 방이 환해졌고 책장에는 늘 책갈피를 끼워둔 다양한 책들이 늘어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낡은 목재 라디오를 잘 조정해서 주파수를 맞추고 심야 라디오를 들었다. 나의 시점으로 이 시절을 살아보지 않는 한 느낄 수 없는 낭만을 사랑했다. 목재 라디오, 책장, 자수, 인형, 미니어처, 소품 따위가 가득한 내 방의 기원을 되돌아보자면 엄마의 영향이 가장 컸다. 어릴 때부터 늘 아기자기한 동화책이나 어여쁜 소설책, 식물원, 취미들을 보여줬다. 수줍게 웃으며 그런 것들을 손에 움켜쥐고는 놓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인어공주가 육지의 잡동사니를 모으듯 내 방은 그렇게 하나 둘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 찼다. 아날로그적인 취미와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자연스레 책이라던지 공책, 소품, 필기류들에 마음이 끌린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으리라.
그 시절의 내가 사랑스러운 것들을 좇는 것과 달리 입에서는 늘 톡톡 쏘는 바늘 같은 말들이 나와서 집에서는 늘 함구하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이 내 말로 인해서 자꾸 커져서 말을 정제하려는 욕구가 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엄청나게 예민한 딸이었던 건 정말 사실이다. 그래서 엄마는 마음에 있는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공책에 다 써보라고 늘 권유했다. 그러다 어느 한 날은 잠이 오지 않아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머릿속에서 자꾸 생각들이 올라와서 이걸 흘려보낼 어떤 장치가 필요했다. 읽다 만 책을 펼치자니 집중은 하나도 안 돼서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예쁜 노트 하나를 폈다. 그렇게 한두 자 쓰며 감정을 정리하고 흘려보내는 법을 스스로 깨우친 것 같다. 말을 어떻게 해야 곱게 전달되는지, 다른 사람들이 내 말에서 의도나 호의만 가져가고 있지도 않은 악의를 읽어내지 않을지.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욕심도 분명 있었지만 그보다 더 컸던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호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던 게 더 컸다.
여전히 말과 관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삐걱거림은 가끔 있지만 그를 조율하는 능력은 생긴 것 같다. 여러 가지 오해를 받아보고, 누군가를 미워해보기도 하고, 미움도 당해보고, 잘 지내보고, 시절인연도 겪어보고 경험이 쌓이면서 더 단단해졌다. 결국 알아낸 건 되게 단순한 사실들이다. 이를테면 호의는 되돌려 받을 생각 없이 순수하게 건네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는 것. 나를 곱게 볼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오해받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오만이라는 것. 세상 모든 일은 미래를 모르듯 알 수 없고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혼란과 새로움 앞에서 의연할 척할 필요도 없지만 웬만하면 의연한 마음으로 대할 것. 타인에게 이상을 바라지 말고 내가 원하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 그렇게 '왜 내 맘에 들게 행동하지 않는 거야'라는 말 대신에 '아 나는 이런 걸 원하는구나'를 생각하며 살다 보니 도끼눈을 뜨고 마음을 못되게 먹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게 일기는 나를 되돌아보고 내가 되고 싶은 내 모습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주었으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독려해 주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남을 보며 왜 다르냐고 책망하기보다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 배울 점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나와는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온 그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존경한다. 그렇게 한 계단 씩 세계로부터 나를 분리하고 타인으로부터 분리했다. 그리고 차분히 스스로를 알다 보니 생각보다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저 그런 20대 청년 중에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성이나 특별성이 0이라는 게 아니라 그걸 누가 꼭 알아봐야 할 필요는 없으며, 이해받을 필요도 없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알고 나만이 나를 견딜 수 있다. 그러니 나의 입체성이나 특별성을 누군가가 속속들이 알게 된다면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타인은 지옥이기에,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타인과 어울리기 싫다는 말은 아닌데 개인의 고유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선을 모두에게 허용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가서 누군가와 깊이 사교하고 싶은 마음도 자주 들지 않는다. 모든 인연이 너무나 소중한 만큼, 모두에게 인연의 끈을 내어주려 하면 내가 망가지게 되는 것 같다. 아직 다량의 인연을 모두 처리할 만큼 성숙한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친구를 만나도, 동료를 만나도, 면접을 봐도 나의 모든 것을 알게 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좀 멀리하게 되는 기준 하나가 새로 세워졌다. 초장부터 본인을 다 이력서처럼 알려주려 한다면 경계하게 된다.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생애라거나 깊은 내면을 알게 되면 좀 불편하다. 난 아직 거기까지 허용한 건 아닌데 그쪽에서 재빨리 '나의 인연' 패키지 안에 넣으려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친한 몇 명과 꽤 오랫동안 깊이 인연을 유지하는 걸 좋아한다. 얕은 관계들도 분명 있고 그들 역시 소중한데 마음을 나누는 사람의 절대적인 양은 좀 적다고 할 수 있다. 마음 여는 속도가 제법 느리다. 그래서 재미있게도 다들 내가 내향형 끝판왕 인간인 것처럼 봐준다. 물론 그런 면도 많다. 요새 mbti 질문을 많이 들어서 그쪽으로 대답을 해보자면 검사결과 entj로 나온다. 많은 사람들과 사교하는 것 자체는 문제없는데 다만 유대의 선을 처음부터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어떻게 요즘 살아가는지 이야기 듣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얼마 전에는 아침에 커피챗 모임을 해봤는데 나랑 잘 맞고 재미있어서 또 해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찰하다 보면 배울 점도 많고 참고해서 내 삶에 적용할 거리도 많아서 참 즐겁다. 그렇게 내가 한 발짝 더 평범함 속에 들어가는 것 같아서 좋다. 우주의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을 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편해진다. '아하, 결국 다들 나랑 비슷하네!' 하게 된다.
내 휴대폰 노트 어플 속에는 깨달음 노트라는 게 있는데, 살면서 얻은 통찰이 있는 문장을 차곡차곡 모아놓은 노트다. 여러 가지 강령이 쓰여있다. 뭘 할 것, 뭘 하지 말 것. 이 타임라인을 보다 보니 내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가 보인다. 가장 최근에 쓴 문장은 '남이 날 그렇게 봤다면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기'다. 내 디자인 포트폴리오에는 브런치에 쓴 글이 몇 문장 들어있다. 그걸 보고 누군가 내게 '독불장군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할까 노파심이 든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내가 이 말을 몇 주씩이나 마음에 품고 속상해하는 걸 보면, 좀 상처받은 것 같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글이나 문장에서 독선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성찰하는 식의 글을 많이 쓰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내 글이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오해를 고치려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처세는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최소 한 달 이상 같이 일하며 그 사람이 날 꾸준히 봐야 하는 환경 안에 놓여있을 때 바뀔까 말까이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날 보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는 그런 단편적인 정보들로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니까 뭐라 탓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그 말을 들은 상황 안에서는 분명 그렇지는 않다고 이유를 들며 첨언을 했지만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냐 마냐는 그 사람의 몫이기 때문에 그냥 오해를 오해로 내버려 둔다. 그냥 그럴 만한 인연이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려 한다. 소통은 내 세계관을 타인에게 이식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세계관이 있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단서를 주고받는 것이므로 완전한 곡해가 생기면 속은 상하지만 그마저도 인정하려 한다. 최소한 내가 나를 알고 있으니까, 타인이 나를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나 역시 선을 다 지워버리고 다 오픈하고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매번 개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타인은 내게 미지의 세계고 나는 타인에게 미지의 세계이기에 이 혼란을 혼란으로 내버려 두는 노력을 매일 하고 있다. 통제욕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매일매일의 새로움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