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양심과 사고로부터 자유로운가
도스토옙스키의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은 예수를 만나서 그를 책망하는 말을 쏟아낸다. 천주교의 수장 격이 되는 자가 예수에게 책망이라니.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공감이 안 될 말도 아니다.
사람들에게 왜 자유의지를 줘서 세상을 혼란하게 하고, 서로를 미워하게 하느냐고, 사람들은 배가 고프기 때문에 눈앞의 빵만을 원하지 우리와 같이 예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행하는 것을 알 턱이 없다. 그 얕고 알량한 탐욕들이 모여서 세상에 전쟁이 만연하고 혼란해진다. 당신의 크나큰 사랑을 이해하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된다고 그깟 자유를 내렸느냐고 책망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아주 안 해 본 건 아니다. 니체의 말마따나 신은 없다고 생각을 한 채 천주교를 믿은 세월도 꽤 길다. 신의 여부와 관계없이 초인이 되고 예수가 보여준 사랑을 롤모델 삼아 따르려고 늘 마음을 먹는다. 자유의지는 내게 행복의 단서라기보다는 선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수행의 대상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게 주어진 자유가 감사하다기보다, 벅차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 벅참이 종종 느껴지는 순간은 대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깊은 생각을 하게 됐냐'는 물음을 들을 때다. 마음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늘 내게는 자아가 두 개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양심이나 선 따위는 무시한 채 그저 욕망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쾌락을 행하고 싶은 나, 또 하나는 이를 억누르고 진정으로 내가 행하고자 하는 선을 위해서 묵묵히 걸어가는 나. 이 둘은 늘 내 안에서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인다. 지금 가지고 있는 나의 능력보다 부풀리고 더 잘 포장해서 충분히 나를 어필하고 내세울 수 있는데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계획을 더 빡빡하게 세워서 원하는 목표를 쟁취하고 얻어낼 수 있는데 그런 치열함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쟁취해야만 얻을 수 있는 목표라면 나 말고 이 자리를 자연스레 얻어낼 수 있었던 그 사람에게 공로가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힘들어지고 생각이 많아져서 고통스러울 수 있는 경계를 잘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그러한 역치의 값은 대다수가 말하는 '나경이 참 성실하다'라는 스펙트럼 안에 있어서 잘 티가 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완전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솔직히 난 나를 잘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순간의 나를 인식할 수는 있는데, 자유의지 때문에 어디로 갈지 확답할 수 없다. 이건 통제할 수가 없는 영역이라서 말이다. 이를테면 타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기회가 와서 덜컥 잡는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런 물음이 나올 것 같다. '그럼 목표를 정해서 달려 나가서 미래를 컨트롤하면 되잖아?'
목표를 세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절대적인 인생의 과제처럼 바라보면 시야가 너무 흐려져서 고통스러워진다. 마치 이 목표를 달성 못하면 안 될 것처럼 간절해지는 게 싫다. 그냥 계획이 좀 빗나간 거를, 이해관계에 의해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가능성들을 그저 실패라고 단정 짓고 낙인찍는 게 싫다. 그래서 바라는 마음은 늘 갖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흘려보내려고 한다. 결과로 인해 특별한 기회들이 들어온다면 그걸 온전히 나의 완벽함이라거나 탁월성에 기인한 것이라 보고 싶지 않다. 그냥 그럴 만한 일이 그럴만하게 벌어진 거라고 본다.
욕망이나 집착에 흔들리기 매우 쉬운 사람이라 목표의 성패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한다. 난 그 편이 마음이 편하다. 나의 정의는 그런 것이다. 성패나 노력의 치열함보다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행동을 한 후에 결과에 목매지 않는 것.
그래서 '어떻게 이런 성숙한 사고를 하게 됐냐'라고 한다면, 그건 내가 특별한 탁월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이를 노력으로 치환하려는 노력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은 도덕이나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고 그 가능성을 결과로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니 나의 대답은 '당신도 당신의 선을 행하면 됩니다.'다. 어떻게라는 방법론은 없다. 그냥 인생을 살고 경험하고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행동거지를 성찰하며 스스로의 선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느냐를 되뇌면 된다. 할 수 있다 없다의 경지가 아니다. 이건 말 그대로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를 길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느끼는 이유는, 자유에는 선택이라는 책임이 뒤따르며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르는 까닭이다. 이보다 더 두려운 것은 선택을 아예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역시 선택이라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늘 주어져있는데, 이를 자유롭다고 단순히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로운 상태가 좋은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자유상태가 과연 어떠한 자유를 의미하는지는 매우 막연하다.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디로부터 자유로워할까.
욕망이 있는 한 나는 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욕망과 쾌락을 선택할 자유가 늘 주어져있지만, 그걸 선택하지 않고 스스로의 양심과 선을 따르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감사함이 뒤따른다. 이를 선택한 이상 사회가 어쨌다느니 누가 나를 헐뜯었다느니 이야기하는 게 우스워지는 것이다. 양심에 따르기에 대한 기회비용이 그러한 가십과 같은 대가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총 한 발에 어떻게 세상 모든 토끼의 목숨을 앗아오겠나. 한 번에 두 마리도 힘든데, 바라는 건 이렇게도 많다. 그래서 욕망이 드는 것을 인정하고 흘려보낸다. 사람들은 이걸 성숙하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그 마음과 욕망을 다스리는 힘을.
그래 내가 봐도 그런 걸 참 칭찬해주고 싶다. 기회비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재미있는 건 인정에는 별 다른 힘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테이블이 테이블처럼 생긴 걸 갖다가 왜 의자같이 앉기 힘드냐고 꾸짖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모두가 알듯이 그냥 그렇게 인정하면 끝난다. 그 테이블이 있건 말건 할 일을 하고 커피를 서서 마시든 테이블 위에 앉아서 마시든 하면 된다.
싸우고 헐뜯는 것을 잘 관찰하다 보면 결국 이 얘기를 서로에게 하는 것 같다.
"너는 어째서 내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되냐."
그야, 통제가 안 되는 게 곧 인간의 본질인 까닭이다. 자유의지는 혼란을 불러온다.
그리고 개인의 선택은 누가 대신해서 행동해 주는 게 아니기에 거기에 미련을 가지면 더 고통스러워진다. 그럼 그냥 최선의 선택을 순간마다 내리는 수밖에 없다. 이 인연을 받아들일지 말지, 이 인연을 더 이어갈지 말지. 그런 사소한 것들인데 이해관계가 무수히 엮여있어서 애매한 차선을 내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늘 극단적인 정론을 행하는 것이 선이라고 할 수도 없다. 관계의 대부분은 이해관계에 기반하기에, 애매한 처세가 마음이 편할 때가 오히려 더 많다.
그리고 이해관계라는 치킨게임은 당연히 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세상은 늘 혼란하고 내 맘대로 안 됨'이 디폴트값이라고 생각한다. 80억 모두가 욕망을 이긴 부처일 수 없는걸 모두가 안다. 그걸 생각하면 '사람은 타인을 늘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 치부하고 스스로를 복잡하게 선한 사람이라 여긴다'는 말이 얼마나 통찰력이 깊은 말인지가 엿보인다.
내가 선택한 디자인이라는 세계 역시 혼란함을 빗나갈 수 없다. 디자인은 어찌 보면 자유의지나 욕망에 대한 반항이 아닐까 늘 생각한다. 한 점을 향해 타겟팅 해서 특정 목표층을 끌어들이려 하고, 대중에게 시각언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대중에게 경청의지가 있건 말건 일상의 틈을 파고들어 우리를 선택하라고 선택지를 내어준다. 그리고 그 선택받음이 곧 재원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선택할 자유의 한편을 늘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Meta의 직원들이 자녀들에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은 늘 즐겁다. 내 말을 대중들이 들어주고 선택해 줘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무언가가 누군가의 취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의 동력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한 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정제해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참 좋다. 뭐랄까 일상에서는 늘 생각이 많은 나지만, 그렇게 타겟팅이나 목표의식을 정하면 물고 늘어지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차라리 그렇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게 감사하다. 생각을 정제하고 가치를 다듬어가는 게 참 좋다. 그것도 일종의 수행이라면 수행이겠다. 우리가 전달하려는 가치를 다듬으려 하는 자유의지.
무엇이 선인지는 스스로 정의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디자인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때, 내가 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당신의 말을 듣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타인의 말을 이해하고, 깊이 숙고하고 질문을 끌어내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게 경청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청에서 중요한 태도는 곧 '당신의 말을 깊이 이해할 만큼 마음이 열려있으며, 더불어 행동의지까지 갖추고 있음'이다.
팀 프로젝트를 할 때를 생각해 보면 나는 누군가에게 참 귀찮은 팀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계속해서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하고 싶다는 의견이라고 이해했는데 맞나요? 그럼 본인이 생각하기에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핵심코어와 본인의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로 합치한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묻는다. 헐뜯으려는 게 아니라 그걸 알아내야 방향성을 명확히 할 수 있어서 그렇다. 가끔은 방향성이 완전 다른 스핀오프도 필요할 때도 있어서 의견을 전부 처분하지도 않는다. 단지 스스로의 정의를 알고싶을 뿐이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아이디어가 나오면 나대로 메모를 계속 추가한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살을 더 붙이면 이쪽 부분이 더 활성화될 것 같아요' 이렇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홀로 프로젝트를 이끌어가야 할 때가 늘 힘들다. 누군가를 구워삶아서 같이 협동을 이끌어내는 리더의 자리보다는 평등한 위치에서 든든히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엮는 팔로워십이 강한 사람인 까닭이다. 자동차가 팀이고 부품이 팀원이라면 나는 핸들이나 페달보다는 볼트 너트 같은 사람이다. 실현 가능한 최선과 차선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협력하는 사람. 그래서 내가 공로를 얼마나 내세웠고 얼마나 기여했고 말고 보다는 팀원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그들이 내세우는 가치와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고 그게 말이 되도록 만들어 줄 때 효용감을 크게 느낀다. 이상을 이상으로만 머물게 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만들고 그걸 소비자나 대중들에게까지 가도록 이끌고 싶다. 그게 나만의 팔로워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