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하면 눈 높으시겠네요

디자이너가 읊어보는 사랑관

by 나경

확실히,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연인으로 공표할 만한 사건이 크게 있던 적이 없다. 그렇다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마음을 전했지만 닿지 않은 경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고, 서로 흐지부지된 경우도 있다.


'디자인'이라는 직함이 주는 힘은 미지의 것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나 보다.

괜히 취향도 고급스러울 것 같고, 예술가적 성향이 강할 것 같고, 자유로울 것 같고 등등. 근데 우리 디자인-종족 역시 인간 카테고리 안에 속해있기에 예술적 성향을 근거로 타인을 모나게 바라보진 않는다. 한 번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디자인하면 눈 높으시겠네요."

기분이 썩 좋은 말은 아니었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상형이나 받고 싶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올 것 같다. 다만 연인이 되기 전이라면 이상형은 나만의 비밀로 고이 간직해 둘 생각이다.




연인이 ‘어떤 사랑을 받고 싶느냐’고 물으면

전하고 싶은 가상의 편지


받고 싶은 사랑이라거나 이상형얘기를 안 하는 이유는 말이야. 괜히 그런 얘기를 해서 너를 틀에 가두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저 내가 만든 판타지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아도 네 존재를 사랑하는 거거든. 역할 수행하는 너 말고, 실제 너를 보고 싶어. 우리 인생이 영화라면, 너와 나의 파트는 전부 애드리브로 점철되어 있으면 좋겠어. 물론 내가 특히 좋아하는 영화 장르, 각본 다 있지. 하지만 난 너를 남자배우로 고용한 게 아니라 삶에 초대한 거잖아. 그래서 나는 판타지의 감독을 해고했어. 그냥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비하인드씬으로 살자.


‘이렇게 했다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해도, 그냥 가보자. 뭐 어때. 인생도 사랑도 알 수 없는 안개숲을 끝없이 걸어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건 좀 뒤로하고 행동해 보고, 언짢았다면 대화하고 풀어가보자. ‘이렇게 해도 돼?’ 말고, ‘이렇게 해봤는데 어때?’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보자.


판타지는 외로움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뿐이야. 이상형이 있다면 딱 하나 있어. 잠들기 전에 오늘 하루 잘 보냈나 궁금해지는 사람. 그 이후로는 어떤 힌트도 주고 싶지 않아. 판타지 충족이 아니어도 괜찮음을 계속 증명해내고 싶거든.


너는 이미 괜찮아. 내가 그 증거가 되어줄게.


내가 만든 허상과 이상화가 네 무한한 가능성을 가로막질 않길 바라. 그러니까 ‘너는 이래서 좋아’라고 말하기보다 ‘고마워’라고 말하고 싶어.


명확한 말이나 개념으로 상대를 규정하기보다 끝없는 미완으로 서로를 남겨두자. 그 이상적인 사랑이란 서로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면 되는 것 같아. 그것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너의 반응이 훨씬 중요해. 그리고 과거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어떤 사랑을 그려나가든 내게는 그 모든 게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일이 될 거야.


그러니까 초심이 흐려지는 걸 그냥 내버려두자. 사람은 성장하고 쇄신하고 나아가기 마련이니까. 그냥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바뀌자. 그 편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네가 멈춰있든, 나아가든 그 어떤 모습이어도 그냥 내 눈에 담고 싶지, ‘너는 왜 바뀐 거야’라고 책망하고 싶지 않아.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 무례를 끼치기는 싫어. 사랑받기에 충분한 존재에게 허상의 책임을 묻는 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 네 오지 않은 미래마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더 단단해져 볼게. 잘 부탁해.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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