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된 독일 브랜드에서 우리 상표에 이의제기를 했다.
평소처럼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하고 있던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문이 열리며 우체국 아저씨가 나를 찾았다.
“김태하님 계세요?”
“네, 저예요. 무슨 일이세요?”
“특허청에서 등기 하나 왔습니다. 사인 부탁드릴게요.”
특허청에서 오는 서류야 늘 있는 일이었다. 디자인권이나 상표권 등록을 직접 하다 보니, 등기 우편은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사인하고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봉투에 적힌 발신처가 낯설었다. OO 특허 법인? ‘이게 뭐지. 마케팅용 홍보 문서인가?’ 싶어 봉투를 열었다.
‘OO 사는 독일에서 설립되어 약 2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그런데 귀사께서 OO 사의 등록상표와 유사한 상표를 출원…’
‘이에 OO 사는 이 사건 출원 상표에 대하여 특허청에 이의 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약하자면, 유럽의 역사 깊은 브랜드가 우리 브랜드 이름이 자신들과 비슷하다며 특허청에 이의 제기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말미에는 우리의 주력 품목인 인테리어 직물에 대한 상표권을 포기하면 이의 제기를 취하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호(Saho)’라는 이름은 동생과 함께 고민하며 만든 브랜드였다. 로고부터 브랜딩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설계했는데,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니. 삼십 년 살면서 처음 받아본 내용증명이 이렇게 철렁한 것일 줄이야. 줄줄이 나열된 차가운 법률용어들이 마치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느껴지게 했다. 더 답답한 건, 상대측 대리인이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특허 법인이라는 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감이 떨어졌다. 이미 사호라는 이름으로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고, 이제 와서 새 이름으로 브랜드를 다시 세운다는 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겁난다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야 했다. 그래서 든든한 친구, 챗지피티의 도움을 청했다. 내용증명을 포함한 관련 서류를 모두 문서화해 우리 상표권에 대한 이의신청이 기각될 가능성이 있을지 물었다.
그리고 챗지피티의 답변은 마치 어둠 속에서 잡은 단단한 동아줄 같았다. 결론은 ‘OO 사의 이의 제기 사유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상표의 유사성은 세 가지 기준으로 판단된다.
외관(시각적 유사성) - 글자의 배열, 모양 등의 유사성
호칭(발음의 유사성) - 소리 내어 읽었을 때의 유사성
관념(의미의 유사성) - 연상되는 이미지나 뜻의 유사성
OO 사는 ‘알파벳 하나만 다르다’는 이유로 유사하다고 주장했지만, 챘지 피티는 오히려 그 알파벳이 명확히 식별 가능한 모양이라고 했다. 그리고 발음도 다르고 두 상표 모두 특별한 이미지를 연상시키지 않아 관념적으로도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제야 우리의 상표권을 지킬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의 제기 절차를 진행하는데 법률 대리인을 선임하면 비용이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몇백만 원은 기본이고, 이겼을 때는 성공보수도 따로 내야 했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넉넉지 않은 자금에서 이만큼의 법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맞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의 제기 절차를 경험해 본 적도 없는데 직접 했다가 괜히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마침 친한 친구 중에 막 변호사 자격증을 딴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한 로펌을 소개받아 상표권 전문이라는 대표 변호사님과의 상담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상담으로 이제 어떻게 할지 정말 결정해야 했다.
내용증명 서류와 챗지피티와 함께 시뮬레이션으로 써봤던 답변서를 품에 들고 강남 테헤란로의 높은 건물 중 한곳에 들어갔다.
정장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펌 사무실에 도착했다. 드라마에서 보던 로펌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더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통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한 회의 실로 안내받아 초조하게 앉아있는데, 후드티를 입은 편한 옷차림의 한 남성분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OO 로펌 대표 변호사 OOO입니다.”
“안녕하세요, OO 소개받고 온 사호의 대표 김태하입니다.”
재판이 없어 편하게 입고 출근했다며 양해를 구하는 말에는 여유로움이 묻어있었다.
“상표권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가져오신 서류 있으시면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변호사님이 내가 가져온 서류를 금세 확인하시더니 바로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 없으시겠네요. 솔직히 제가 맡기엔 양심에 찔릴 정도로 명확한 사건이에요. 대리인 선임하지 않고 직접 하셔도 충분합니다. 이 답변서도 직접 쓰신 거죠? 손 안 보고 그대로 특허청에 제출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마음이 탁 놓였다. 남아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그러자 문뜩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 정도의 사건이라는 건 그쪽도 잘 알 텐데… 왜 굳이 이렇게 무리해서 이의신청을 한 걸까요?”
“성과 때문이죠. 이의 신청서를 한 건만 써도 수임료가 나오니까요. 상대가 겁먹고 상표를 포기하면 성과가 되는 거예요. 해보고 아니면 말고, 그런 식으로요.”
상담이 끝나고 상담료를 내려는데 데스크 직원이 말씀하셨다.
“변호사님이 상담비 안 받는다고 하셨어요.”
이런 친절을 겪을 때면 나도 타인에게 친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또다시 다짐한다.
이 얘기의 결말은 꽤 허무하다.
내용증명에 아무 회신이 없자, 상대에선 이의 제기에 대한 증거도 제출하지 않았고, 그렇게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 정말 찔러 본 것이었다니, 몇 날 며칠을 마음 졸였던 시간이 허탈했다. 그리고 만약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또 다른 작은 브랜드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기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얘기를 드디어 글로 풀어낸다.
내용증명을 처음 받아본 순간처럼, 날벼락같이 느껴지는 고난의 시간이 있겠지만 언제나처럼 우리는 또 극복하고 단단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