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나도 내가 애틋하다고

by 오후

아이를 키우면서 그 어느 때보다 한계에 부딪치는 일들이 많다. 도무지 아이는 이론대로 커주지를 않고, 내 마음도 결코 육아서처럼 되지가 않는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를 가정보육하면서 잘 놀아주고, 식사와 간식도 영양가 있게 챙겨주고, 화를 내지도 않으면서 집안일까지 다 해. 부럽다. 혹시 누가 도와주나? 그것도 아닌데.. 왜 난 못 하지.. 다들 잘하는데 왜 나만 못하면서 힘든 걸까'


그뿐이랴, 아이 키우면서도 부지런히 자신을 갈고닦아 여러 성과를 내는 분들이 많다. 그동안 주위의 뛰어난 친구들, 뉴스 기사에 나올 정도로 성공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던 버릇 그대로, 아니, 아이들이 태어난 뒤로는 그보다 더 심하게 비교하면서 초라한 나를 탓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다 엄마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고,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다. 단순히 그래야 하겠다는 생각만으로 바뀌고 움직여지지 않는 인생의 제일 험난한 파트이다.



나는 그동안 나를 어떤 식으로 대해왔던가..


예전부터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왔다. 엊저녁 가족에게 건넨 말이 옳았는지, 아까 낮에 친구와 통화할 때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그때 농담도 구분 못 하고 눈치 없이 얻어먹은 건 아니었는지 등 여러 상황 속 내 행동을 매일같이 반성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자신을 아끼는 길이라 여겼던 것 같다.


사회공포증과 같은 두려움으로 초등학교 내내 등교거부가 심했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놀이치료가 대중화되었지만, 그땐 아이의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일이 드물었다. 왜 그러는지 물어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던 그 어렸던 마음. 내가 더 먼저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아무도 함께 머물러주지 않았던 마음. 고집불통 소리를 듣고, 나만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되었던 경험들 속에서 '나만 고집부리지 말고 잘하면 돼. 좀 참고 해!'라는 말을 내면에 새기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속상하고 외로운 고민을 만약 누군가 알아줬더라면, 내가 잘못된 게 아니구나 안심하고 용기 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학교에서 체벌도 자주 있었다. 교단으로 불려 나가 다른 아이들 앞에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일은 물론, 반의 몇 명이 잘못한 걸 가지고 단체기합으로 연대책임을 지기도 했었다. 모든 선생님들이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처신을 잘하지 않으면 쉽게 비난받고 서로를 비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어."라고 더 자주 들려줬더라면 덜 두려웠지 않을까. 다른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덜 애쓰지 않았을까.


집에서 이런저런 불만과 어려움을 말하면, "너보다 힘든 사람들도 많다. 너는 고마워하고 살아야 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해봐도 현실이 달라지는 건 없었고, 지독한 원망의 끝에 스스로를 누그러뜨리려 고개 드는 생각은 결국 이랬다.

'내가 바라는 건 역시 욕심이야.. 이 정도는 힘들어하면 안 되는 거야..'

다들 고생하는데 별 것도 아닌 일로 힘들어한다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래.. 너도 힘들지.."

"너도 많이 애쓰고 있는 것 다 안다.."


어쩌면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없어서 나는 보통의 힘든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할 수가 없었나 보다.







내가 봐도 좀 후져
근데 그걸 인정하기가 힘들어
난 내가 애틋하거든..
나라는 애가 좀 잘 됐으면 좋겠는데...

*출처 : JTBC <눈이 부시게>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 <눈이 부시게> 1화에서 혜자가 아나운서 면접에 실패 얘기를 준하와 나누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혜자처럼 누가 뭐라든 나만은 후진 나를 미워하지 말고, 동시에 좀 애틋하게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 가해자의 시선에 함께 서 있지 말고 나만은 내 편이 되어 애틋하게 감싸줬더라면.. 다른 사람에게만 친절하지 말고 나에게 먼저 친절했더라면.. 그 어느 날 밤에 혼자 울지는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심리학 개념 중에 '자기자비(self-compassion)'라는 것이 있다. 자기자비란 고통에 처한 자신을 온화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일의 원인으로서 잘못이나 결함을 탓하보다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인내하고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했을 때의 자신을 예뻐하고 사랑해주는 일은 쉽지만, 부족한 나를 괜찮다고 받아들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결국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부족한 나조차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힘들 때 위로를 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나 때문에 속상한 아이를 위로하고,

남편이 힘들까 봐 배려하고, 그러했던 시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고,

섭섭하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했던 친정엄마를 이해하고,

그런데 나의 마음은 누가 위로해줄까.


나는 타인의 고통은 보듬어줄 수 있지만 자신에게는 혹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타인의 아픔을 볼 수 있는 건 내 안에도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아픔이 공감되고 또 내가 위로받고 싶었기에 다른 사람을 더욱 감싸주며 보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다고 내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저 나의 아픔에도 똑같이 진실된 위로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스스로를 대우하며 살아왔든 이제부터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소중하게 나를 대하고 싶은 마음, 지금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오늘은 그냥 좀 힘들어하자... 몸이 아플 때 쉬는 것처럼 마음이 아플 때에도 쉬어가자. 이 마음이 내일 아침 흘러가기를 기다리자. 마치 아끼는 친구를 위로하듯 나를 달래주는 따스함이 쌓여서, 내 아이에게도 불만과 재촉 대신 자비로운 사랑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