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바람에는 기억이 있다

by Sophie

1.

근래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가, 독립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다.

작가가 몇 년간 제주도에서 살면서 쓴 글을 엮은 거라던데,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도, 무엇에 관한 책인지도 모르는 채로 처음 펼친 페이지에 홀려 다른 책들은 구경도 못하고 서점을 나왔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번 주 수행과제였다. 법륜스님이 방송에서 물었고, 나는 일주일 동안 생각한 뒤에 글로 응답했다.

"제게는 다정함입니다. '사랑'은 너무 거대하고 '친절'은 또 너무 행위적이어서, 소박한 애정쯤 되는 '다정함'이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내 안에서 다정함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이 제게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이 꺼질 듯 흔들리면 저는 저를 미워하거나 비하하게 됩니다.

타인과 세계를 원망하고 혐오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자주 했습니다.

제게 중요한 의미이자 가치인 다정함은 추운 겨울밤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꺼지지 않는 한 저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탈한 하루 - 강건모]


나는 다정함을 동경한다.

사랑은 말로, 친절은 행위로, 어떻게든 조악한 흉내라도 내볼 수 있겠지만 다정함은 순간이라기보다는 상태다.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그래서 끊임없이 만들어내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 안에 잔상만 남기고 사라져버리는 어떠한 찰나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 찰나는 때때로 거대한 파란을 일으킨다.

때문에 다정함에는 관성이 있다.

소박함이 야기한 파란을 한번 경험한 사람들은, 그 경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다른 나비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정함은 힘이 드는 일이라서, 매일매일 나를 다독이지 않으면 그 하루는 다정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다정하고 싶은 사람은 나를 가장 먼저 다정히 대해주어야 한다.

나를 어르고 달랜 후에야 비로소 남은 다정을 조금 넘치게 두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 잔잔히, 누군가에게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2.

스치는 바람에는 기억이 있다.

가끔 어느 식당의 이국적인 향이 풍겨오면 어느 때의 여행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냄새 말고 바람에도 기억이 있다.


오늘은 갑자기 가을인것마냥 출근길에 내 주위를 훅 돌아서 멀어지는 바람에 흠칫 놀랬다.

언젠가 내가 이 바람을 참 좋아했는데. 이 바람을 맞으며 나서는 걸음을 참 설레했는데.

그게 어디 가는 길이었더라, 한참을 곱씹었다.


어느 누구는 잎새에 스치우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데, 나는 나를 스치는 바람에 그리워하나보다.



3.

처음에 국제 학교에 갔을 때,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내가 첫 에세이 과제에서 영어선생님의 부인을 (심지어 선생님 본인도 아니다) 감동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주제가 뭐였더라. 가장 소중한 것을 소개해 보세요 하는 두 장짜리 과제였던 것 같은데, 구구절절이 할머니에 대한 글을 되지도 않는 영어로 써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다섯 작은 소녀에게 인생 최대의 두려움은 할머니의 부재였는데, 그 할머니를 떠나 중국에서 살게 된 첫 달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하고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던 070 전화기를 붙들고, 갑작스런 할머니의 부고를 들을까 매일밤을 지새웠다. 그해 여름이던가, 교회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울며불며 할머니 얘기를 해서 사람들은 우리 할머니가 곧 돌아가시는 줄 알았단다. 그래서 그 시절의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조심스레 할머니의 안부가 오고 간다.


열다섯 소녀의 인생 최대 두려움은 대학생이 된 스무 살 소녀에게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한번은 새벽에 잠에서 깨 울면서 낮이었을 한국에 전화를 건 적이 있다.

“할머니, 내가 할머니를 하나님보다 사랑해서 하나님이 할머니를 데려가시면 어떡하지?”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나현아, 하나님은 네가 연약한 아이라는 걸 아시는 분이야.”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어느 노래 가사였나. 내 옆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수 있구나.

사랑해도 사랑하고 싶을 수 있구나.

나중에 내 아이를 이만큼은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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