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나이가 어느덧 훌쩍 지나고

웬만한 일엔 꿈쩍도 않을 수 있게 되는

by Sophie

1.

일이 있어서 잠시 강남에 들렀는데, 그게 너무 화가 나서 신발을 하나 샀다. 왜 다들 노는데 나만 목적 있는 발걸음을 했냐 이 말이지. 꽤나 만족스러운 소비였고, 쇼핑백을 달랑달랑 흔들며 다시 일을 보러 갔다.


화 라는건, 어쩌면 정말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들지만, 사실 화는 고작 신발 한 켤레 정도의 무게인 것이다.


그러니 신발 한 켤레 만큼의 위로를, 신발 한 켤레 만큼의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가장 필요한 때에, 누군가 분을 참지 못해 온몸을 바르르 떠는 그때에, 잠잠히 신발 한 켤레의 말과 신발 한 켤레의 가슴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괜찮을거야, 미안해, 한마디가 당연한 사람이 되자.



2.

나는 참 예민하고도 소심한 사람이다. 된소리를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랄까. 그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 나와 큰 마찰을 빚고, 사실 아무도 몰랐을 그 마찰을 집에 돌아와 두고두고 곱씹는 그런 사람이다. 곱씹다 보면 나는 나의 존재 자체와 부딪치고, 잠시 혹은 오랫동안 나를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복기해야만 한다. 혹시나 지나갔던 그 미묘함의 순간들을, 그때의 대화를, 그리고 그것들이 나를 할퀴고 간 자리를.

그 작업이 끝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로부터 한걸음 밀어내졌을 누군가에게 심심한 사과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김동률이 노래하는 그래도 되는 나이가 어느덧 훌쩍 지나고 웬만한 일엔 꿈쩍도 않을 수 있게 되는 그 나이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고작 이십 대 후반인 나에게 근 시일 내 도래할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오긴 오는 걸까.


산 같은 사람이고 싶다. 앉은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고작 바람 따위에 내가 두려워할쏘냐 싶은, 그런 산 같은 사람이고 싶다. 하찮은 동산이어도 좋으니, 그저 나를 지나는 모든 날들과 멀어져 여전히 그 자리에 그저 있는, 단단한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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