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치의 심심한 감사를 전하며

by Sophie

1.

그저 만만한 건 신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

그렇다면 보인다고 다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환상일 것도 같다. 어쩔거나, 이 인생의 덧없음을.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 - 시편 103:15~16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습니까.

[한 말씀만 하소서 - 박완서]


지난주였나, 엄마에게 카톡으로 "나현아,라고만 보내지 마." 했다.

"왜?" 하고 의아한 듯 묻는 엄마에게

"그냥, 이름만 부르면 무슨 일 난 것 같잖아." 그랬다.

사실 정확히는, 나는 엄마가 "나현아," 뒤에 할머니의 죽음을 말할까 봐 두려워한다.

몇 년 전 친할머니의 부음이 "나현아,"로 시작되었던 것을 아직 나의 온몸이 기억하기 때문에.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비할 바가 되겠냐마는,

언젠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그 일이 나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우려해왔다.

샅샅이 죄책감으로 치환될 내 하루의 기쁨들과,

결국에는 후회로 점철될 일말의 그리움,

그리고 아마도 꽤나 길게 이어질 날들을 나는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이래서 사랑은 쉽게 주고받으면 안 되는 걸 텐데.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된 사랑이 여태 남아

그 색조차 바래지 않고 넘실댄다.


아아 차라리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될걸, 하다가도

지금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그 온도를 갖추고 있는 것은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임을 깨닫곤 하는,

되풀이되는 변덕에 나는 자꾸만 불안해진다.


끊임없이 지나쳐온 선택의 순간들 중 그것의 의미를 알게 하지 않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나는 내 생의 걸음들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후회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는 때가 있다면,

'조금 더 머무를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 '이번이 마지막이려나' 하는 떨림.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 대한 살의를 느낄 것 같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당신에게 소심하게 간구하는 것이 있다면.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테니 나의 사랑을 충분히 고백할 수 있는 시간만 허락해 주세요, 하는 기도.



2.

아프리카에 온 지 벌써 두 달이나 되었더라.

드디어 조금씩 하루의 루틴이 생기나 했는데, 이제는 일이 쏟아진다.

차장님이 지부장님이 되시면서 원래 계시던 과장님을 건너뛰고 차장급의 업무가 모조리 나에게 왔다.

본부에서는 별명이 삐약이였는데,

갑자기 목청 터져라 꼬끼오, 울어야 했다.

본부 과장님이셨던가,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은 현장에 일부러라도 가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거예요" 하셔서 꼭 그러겠노라 대답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개뿔, 일주일에 세 번씩 그 길에 오른다.

지난주에는 일주일을 풀로 현장에서 살았고, 지금은 8시간 떨어진 현장에 출장을 가는 차 안이다.

사무실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아프리카의 새파란 하늘 정도로 두려움과 고단함이 무마되는 나의 단순함.

아프리카행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가 두 가지 있다면 하늘과 아이들이었는데,

그 둘은 여전히 나의 하루치 버틸 힘이 된다.

대리님이 "하늘 때문에 아프리카 가는 사람 처음 봤어요" 하며 웃었었다.

그치만 정말 고작 그것만으로, 이제는 생길 법도 한 일말의 후회조차 움트지 않는다.

출장 가는 길, 자동차 창문으로 스쳐가는 하늘이 어여쁘다 못해 뭉클해서.

내가 그것으로 먹고살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에 갑작스레 곱씹어 보는 나의 지난 두 달.


적어도 하루에

여섯 번은 감사하자고

예쁜 공책에 적었다


하늘을 보는 것

바다를 보는 것

숲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기쁨이라고

그래서 새롭게 노래하자고


먼 길을 함께 갈 벗이 있음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서 감사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픔 중에도 감사하자고

그러면 다시 새 힘이 생긴다고

내 마음의 공책에 오늘도 다시 쓴다

[어떤 기도 - 이해인]


십 대 언저리에,

조금은 투박한 이 시를 그렇게 달달 외우던 때가 있었다.

문자 이상의 시상이랄 것도 없는 이 시가 왜 그렇게 마음에 박혔는지 그때는 몰랐는데,

나는 이렇게 살고 싶었나 보다.

매일이 두렵고 고단해도,

종국에는 하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생을 꿈꿨나 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끝내주는 하늘이 있는 곳으로 나를 보내신 당신에게,

오늘 하루치의 심심한 감사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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