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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Apr 25. 2021

나는 안소니 홉킨스가 오스카를 타는 것에 이견이 없다

영화 <더 파더> 리뷰

내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하나둘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 온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이지 않을까. 세상은 그대로인데 잘못된 건 나 자신이라는, 뼈 아픈 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는 건 거의 고통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 위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노년을 맞이한 것으로 보이는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분)가 등장했다. 그런데 느긋해 보이는 안소니와 다르게 빠른 발걸음으로 그의 집으로 향하는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은 어딘가 다급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이 두 사람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관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소니가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단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지금 머물고 있는 집이 자신의 집인지 아니면 앤의 집인지 혹은 루시가 자신의 곁에 있던 때인지 아닌지 심지어는 아침인지 저녁인지를 헷갈려하는 그를 관객들은 숨 죽이고 조용히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방금 전 봤던 장면이 곧장 다른 버전으로 되풀이되면서 관객들은 어느 버전이 진짜인지 머릿속으로 바쁘게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다.


줄리안 무어에게 오스카를 안겨준 영화 <스틸 앨리스>를 비롯해 그동안의 알츠하이머 영화가 관찰자 시점이었다면 <더 파더>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치 내가 등장인물이 된 듯한, 신기한 체험을 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게 뭐지...? 아까 본 게 진짜야 아니면 이번 버전이 진짜야??' 하고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장면과 이야기들을 이어 붙이다가 이런 혼란 자체가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을 간접 체험하게 해주는 장치라는 것을 깨달은 뒤 관객들은 그저 안소니가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혼돈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게 된다.


애초에 프랑스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진 <더 파더>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영화로 제작된 케이스다. 연극이 원작이었기 때문에 실내극이 되었고 제한된 공간 내에서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요소를 연출과 미술로 살려냈다. 플랫 내에서 안소니가 이따금씩 느끼는 낯선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공간을 여러 개로 나누어 이동할 때마다 이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고 버전에 따라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 등에 미묘하게 변화를 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이렇게 영화적 장치를 잘 사용한 덕분에 <더 파더>는 많은 이들에게 영화를 관람한 후 거꾸로 연극에 대한 궁금함을 키워주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특징 때문에 이 영화는 무엇보다 배우가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캐스팅 목록에서 안소니 홉킨스와 올리비아 콜맨이라는 두 배우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관객들은 아직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고 이 영화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 마저도 <더 파더>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만든다. 이름만으로도 뒤돌아 보게 만드는 배우라니... 그만큼 <더 파더>에서 이 둘의 영향력은 힘이 세다.



내게 올리비아 콜맨은 감정 표현이 가장 풍부한 배우로 기억된다. 그녀가 단 몇 분 안에 시청자들을 얼마나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배우인지는 2019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스태프에게 시간이 부족하니 빨리 끝내라고 재촉을 받을 정도로 그녀는 기나긴 수상 소감을 이어나가는데 어쩌면 길고 어쩌면 짧은 이 영상을 보는 동안 나는 매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가 웃기를 반복한다. 그녀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할 때면 올 것이 오는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하지만 자꾸만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올리비아 콜맨에게 <더 파더>가 무엇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소키 홉킨스는 그녀의 연기에 맞춰 그저 자연스럽게 반응만 하면 될 정도로 연기가 수월했다며 올리비아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그리고 <두 교황> 등으로 60여 년 동안 약 80편의 영화에 출연한 안소니 홉킨스는 어마어마한 연기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배우다. 그리고 그간 보여준 여러 가지 모습을 <더 파더>에서 틈틈이 녹여내며 익살스러웠다가 얄궂었다가 때론 예민한 안소니 역을 정말이지 완벽하게 해낸다. "파리 사람들은 영어도 못해."라며 파리로 이주한다는 딸을 걱정하지만 루시와 비교하며 차갑게 앤을 대하는 모습에선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며왔다. 영화는 (당연히) 관객에게 어떻게 해야 좋다는 식의 해답을 제공하진 않는다. 대신 가장 가까이서 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피며 여러 차례 복잡한 심경에 빠지는 올리비아 콜맨에게 감정 이입을 하다가도 끊임없이 안소니 입장이 되어 관객들은 당황스러움과 막막함을 자연스레 경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후반부에 '잎사귀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라는 그의 대사에선 결국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나름 근작인 <두 교황>도 좋았지만 <더 파더>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정말 어나더 레벨, 거장의 연기라는 말 외에 별다른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더 파더>로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령이자 80대에 두 번째 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영화를 관람하고 나자 안소니 홉킨스가 이번에 오스카를 타는 것에 이견을 달 여지가 없었다. 내일 있을 제 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기다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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