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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May 02. 2021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만큼 불행하지 않은 삶

영화 <노매드랜드> 리뷰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갑작스런 사건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이 크게 틀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그 변화가 오히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면?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습도 그럴듯한 삶도 아니며 때론 나를 금전적인 어려움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예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에 점차 익숙해지고 결국엔 이 모든 것이 오히려 괜찮게 느껴진다면, 사람들은 향후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예전의 안정적인 생활을 향해 다시 한번 유턴을 할까 아니면 새로운 길에 만족해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갈까.


클로에 자오Chloé Zhao 감독의 <노매드랜드>는 주인공 펀Fern(프란시스 맥도먼드 분)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한 지역을 지탱하던 석고 공장마저 갑작스레 문을 닫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개의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말 그대로 길 위에 나앉은 펀은 딱히 정해진 목적지 없이 광활한 미국 땅을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달리다가도 어느 지역에선 잠시 머물며 생활비를 벌기도 한다. 그런데 보는 것만으로도 막막함을 느끼는 나와 달리 스크린 위의 펀은 시종일관 평온한 모습을 유지한다. 게다가 그는 이미 중년을 훌쩍 넘은 나이다.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기보단 어느 때 보다도 안정적인 삶을 추구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그는 어떻게 저렇게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



"No, I'm not homeless.
I'm just houseless."


펀은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가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2007년 경제 위기 속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길 위로 내몰린 중년 혹은 노년의 백인들이다. 그들은 빙 둘러앉아 정부를 비난하기도 하고 대기업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이런 떠돌이 생활을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없는 대도시의 삶 속에선 미처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해방감을 느끼고 생의 마침표를 찍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본 경험담을 자랑스레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펀의 담담함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아줌마 홈리스 라면서요? 정말이에요?"라는 질문에 "아니, 난 내 명의로 된 집이 없을 뿐 거처가 없는 건 아니야."라는 그의 대답. 삶이란 우리가 규정짓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렇게 경계를 벗어난 삶의 긍정적인 측면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노매드랜드>는 제시카 브루더의 논픽션 책 <노마드랜드>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원작이 논픽션이었으니 영화도 자연스레 다큐멘터리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이 영화는 독특하게 극영화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펀이라는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글로벌 기업의 노동 착취 구조를 고발하고 양극화된 사회를 비난하기보단 캐릭터와 이야기에 더 무게를 실은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자 가장 큰 장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일반적이고 보통이라고 불릴, 정상성의 범주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이 있고 다른 이의 삶을 엿보기도 비교하기도 쉬운 현대 사회에선 저마다의 '옳은 기준'을 갖기도 쉽다. 그래서 각자 기준을 가지고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을 보면 "너는 왜 그래?"라며 무례한 질문을 통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쉬운 시대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은 오히려 굴레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든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울타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 영화가 이렇게 경로를 벗어난, 유랑족을 바라보는 태도는 영화 후반부에 펀과 언니의 대화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사람들은 너를 유별나다고 했지만 넌 사실 용기 있고 솔직한 거였어. / 네 빈자리가 나의 가장 큰 손실이야."라며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눈물겨운 작별 인사 없이, 다음 날 자매는 쿨하게 쎄이 굿바이를 한 뒤 각자의 갈 길을 간다. 서로 간의 거리감을 받아들이고 각자 삶의 방식을 존중하기로 협약이라도 맺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밥Bob은 남편 보Bo가 떠난 후, 일정 기간 동안 엠파이어를 떠나지 못했던 펀에게 자신의 사연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그의 아들은 5년 전에 자살했고 그는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그런데 그 사건 이후 그는 더 이상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길 위에서 또 만나요(See you down the road)."라고 이야기하면 한 달 후나 일 년 후, 어떤 때는 몇 년이 지나고 나서도 다시 만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도 언젠가는 먼저 떠난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라며 따뜻한 위로가 섞인 말을 건넨다.


<노매드랜드>는 광활한 미국 풍경과 아름다운 석양을 뒤로 한채 차분하게 이어지는 대화들로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조용히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시종일관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떻게 사는 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일지에 대하여. 비록 그게 길 위에서의 삶일지라도 자기 확신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 결정이라면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만큼 불행할 리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그저 '자유로운 삶'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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