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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Sep 25. 2021

낮술이 주는 위안과 즐거움

책 『낮술』 리뷰 / 하라다 히카

적당히 가볍고 재밌는 책이 읽고 싶었다. 재밌는 책은 언제라도 대환영이지만 최근 읽은 책들이 연이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갑자기 순수하게 재밌는 책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다. 그렇게 '재밌는 책이 읽고 싶어!'라는 일념으로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가 『낮술』이란 제목에 시선이 멈췄다. 약 2초 정도 고민을 하다가 마우스로 제목을 클릭했다. 김혼비 작가 님의『아무튼, 술』을 떠올리며 제목에 '술'이 들어갈 정도라면, 일단 책 내용이 무겁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보는 일본 작가의 신간이었지만 목차를 훑어보니 음식과 동네, 술이 삼위일체를 이룬 구성이 흥미로웠다. 이쯤 되면 안 읽을 이유가 없었다.


두 손에 책이 쥐어진 건 추석을 앞둔 주말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에세이라고 생각했던 책이 알고 보니 소설이었다. 아뿔싸. 챕터마다 길이가 짧고 나카메구로, 신주쿠 이런 식으로 실제 지명이 등장해 당연히 도쿄 구석구석을 누비며 쓰인 맛집 에세이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그런데 첫 챕터를 읽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술 위주로 줄줄이 술 예찬만 이어지는, 제목 값을 하는 책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술과 함께 페어링 되는 음식과 도쿄 시내 곳곳에 위치한 가게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절로 그려질 정도로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었다. '칭찬해주고 싶다. 여기에 오기로 결정한 십 분 전의 나 자신을 힘껏 안아주고 싶어.'라는 구절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이 책을 발굴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있었다. '이 책을 고른 나를 칭찬한다. 이번엔 모처럼 제대로 골랐네.'


일본엔 요리를 소재로 한 만화, 드라마, 영화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에 비해 요리를 소재로 한 에세이나 소설이라면 떠오르는 작품의 수가 아무래도 적다. 만화나 드라마, 영화는 시각화를 통해 요리의 핵심인 맛을 간접적이지만 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어릴 적 미스터 초밥왕이나 요리왕 비룡 같은 만화책을 보며 만화책에 등장하는 요리의 맛이 너무나도 궁금했던 적이 있다. 주인공 쇼타의 초밥을 입에 넣자마자 심사위원들은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이내 그들의 입 안에선 파도가 철렁이고 참치가 펄떡이는 장면이 연출된다. 그리고 급기야 초밥을 먹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심사위원들을 보면서 독자는 만화에 등장하는 요리가 얼마나 굉장한 맛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드라마와 영화라면 여기에 소리가 더해진다. 뜨거운 기름에 재료를 넣자마자 "쏴아아아" 하며 자글자글 기름이 끓는 소리나 완성된 요리 위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보고 있으면 왠지 스크린 너머로 냄새가 풍겨올 것만 같았다. 일본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밤늦은 시간에 <심야 식당>을 보며 괴로워했던 경험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쯤 되니 유튜브 먹방 이전에 요리를 소재로 한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있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빠뜨리고 음식을 글로만 표현한다고? 그러면 아무래도 좀 허전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이 역시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페이지를 넘길수록 확신하게 됐다. 정말 여러모로 기대를 벗어나는 책이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낮술』의 주인공인 이누모리 쇼코는 '지킴이'라는 조금 독특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뜻이 아니라 '밤부터 아침까지 지켜봐 드립니다'라는 의미의 지킴이다. 심야에 누군가가 잠들 동안 곁에 있어주고 간단한 도움을 주는 일 외에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주로 저녁 시간대에 일하는 싱글맘의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자는 동안 상태를 봐줘야 하거나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동안 나이 든 개를 돌봐주어야 할 때, 얼마 전 배우자를 잃고 상심해 있는 친구가 걱정되어서 등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의뢰인들이 쇼코에게 일을 맡긴다. 중간중간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읽는 건 허용되지만 일 하는 도중에는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 밤새도록 깨어있는 것이 지킴이의 가장 큰 의무니까. 그렇게 동이 트고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는 시간이 되면 밤새도록 일한 쇼코도 퇴근을 하게 된다. 퇴근 시간은 조금 이른 아침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오전 10~11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퇴근 후, 고단한 일을 마친 자신에게 맛있는 점심과 그에 어울리는 술을 마시는 것으로 그녀는 하루를 마무리 짓는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밤늦은 시간에 술잔을 기울이는 것처럼 그녀에게 낮술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주어지는 쉼이자 즐거움이다.


'보리밥이 무한으로 제공되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먹을 수도 없고.'

쇼코는 음식에도 술에도 매우 진심이다. 처음 가보는 동네라고 할지라도 여느 식도락가들처럼 그녀는 맛있는 음식점을 찾는 촉이 매우 발달했다. 맛집인지 아닌지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인터넷 리뷰나 후기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먹는 한 끼라면 누구라도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것처럼 쇼코에게도 퇴근 후, 낮술과 함께하는 한 끼의 무게는 무척이나 크다. 그래서 낯선 골목길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괜찮은 음식점을 발견한 후에는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는 무엇인지, 이 음식과는 어떤 술이 가장 잘 어울릴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꼼꼼하게 메뉴판을 살핀다. 그녀의 말처럼 아무리 음식이 무한으로 제공되더라도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위의 크기는 한정돼있기 때문에 무한 리필 같은 단어가 혹 해서 너무 성급하게 배를 채워선 안된다. 그랬다간 더 맛있는 음식을 채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다른 음식을 맛보기도 전에 가득 차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낮술』의 저자 하라다 히카는 소설을 쓰기 이전에 라디오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여 방송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음식에 관한 글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도 그녀의 글이 결코 뒤지지 않는 이유는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장면으로 이어지는 글을 써온 그녀의 이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주위의 풍경이나 가게가 주는 이미지, 눈앞에 놓인 음식들이 자연스레 그려졌기 때문이다. 분명 글을 읽고 있지만 마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글. 그리고 『낮술』을 다 읽고 난 이후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게들이 모두 도쿄와 오사카에 실존하는 가게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쇼코와 함께 소설 속의 가게를 자연스레 드나들 수 있었던 건 이런 현실감과 디테일이 더해졌기 때문 아닐까.


매일 때 되면 챙겨 먹는 게 음식이지만 한 끼는 무척이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때로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될 수도 있지만 만족스러운 한 끼는 엄청난 행복감을 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싫어 마시기 시작한 술이지만 이제 쇼코에게 낮술은 하루를 무사히 보낸 보상이자 위안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이혼 후 혼자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만 지킴이 일을 하며 의뢰인들에게 공감과 안정을 주는 동시에 때론 그들에게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착실히 쌓여간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에너지로 그녀는 이제껏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나아갈 용기를, 서서히 얻게 된다.


쇼코가 곁에 와서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건네기라도 한 것 처럼 소설을 읽고 나자 도쿄 어딘가에서 낮술을 하고 있을 그녀에게 응원을 말을 전하고 싶어졌다. 맞은편에 앉아 함께 술잔을 부딪치며 "간빠이-"라고 이야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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