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다시) 시드니 1월호

by Ronald

지난해 말에 입사가 결정되어 (다시) 시드니로 돌아가게 되었다. 준비 기간으로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이 주어졌고 그래도 처음은 아니니 충분한 시간이지 않을까 했는데 오산이었다. 처음이 아니라 뭘 준비해 가면 좋을지 잘 알다 보니, 끊임없이 떠오르는 리스트를 출국 하루 전까지 쳐내며 겨우겨우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인천 공항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웠고.



오미크론 때문에 시드니 코로나 확진자 수가 한창 올라가고 있던 때라 입국이 조심스러웠는데 고맙게도 친구들이 피켓 들고 공항으로 깜짝 마중을 나와주었다. 전혀 예상 못 했던 일이라 벙찐 얼굴로 친구들을 맞았고 비행기에선 승무원이, 시드니 공항에선 공항 직원이 도와줄 정도로 짐이 많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꽤 멀었던 숙소까지 친구들 덕분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당신들은 나의 에인절-



친구에게 서바이벌 키트를 건네받았고 열어보니 호텔에 묵는 동안 먹을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코로나 자가검진 키트와 맥심까지 들어있는 세심함에 나는 울고. 시드니 오자마자 숙소에서 미역국 먹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게 바로 접니다.



2012년에 구입한 DSLR을 사용한 지 딱 10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잘 작동하기도 하고 높은 가격 장벽 때문에 선뜻 업그레이드를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면세 찬스로 좋은 가격에 새 카메라를 구입하게 되었다. 액정 필름 붙이고 UV 필터까지 착실히 끼워서 세팅 완료. 새 카메라를 개봉하니 보기만 해도 배 부르단 말이 뭔지 조금 알 것만 같았고. 앞으로 10년, 또 잘 부탁해-



나름 국제 이사인데 할당된 러기지 2개에 좋아하는 컵을 가져가는 건 조금 오번가 했는데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아침마다 익숙한 잔에 커피를 내리니 새로운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낯선 감각들이 조금 누그러졌다.



짧은 기간 동안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결국 탈이 났고 도착한 3일 차에 대상포진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주변에 대상포진을 앓았던 친구들이 제법 있었지만 내가 걸릴 거란 생각은 1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들리던 소문대로 대상포진은 고통스러웠고 나흘 밤을 잠 못 자고 앓다가 겨우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도착한 주에 하필 시드니 확진자가 하루 10만 명을 찍었고 대상포진은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발병하는 질병이다 보니 지금 코로나까지 걸리면 큰일이겠다 싶어 며칠은 숙소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와 중에도 출근일은 다가오고 집을 보러 가야 하는 등 할 일이 태산이었는데 며칠을 그냥 흘려보내며 나는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고, 이쯤 되니 연초부터 나는 시드니에 온 게 아니라 고생길 게이트를 연 건가 싶었다.



주말에는 잠시 친구 집에 머물렀다. 사진으로만 보던 장소를 직접 방문하니 왠지 모를 익숙함과 새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는데 보면 볼수록 친구를 닮은 공간이라 금세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틀간 사육당하듯 잘 먹고 여러 이야기들을 쉼 없이 쏟아냈다.



종이책을 선호하지만 국제 배송비가 부담스러웠고 이사 다닐 때 무척 짐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북 리더기라는 신문물을 사용해보기로 했다. 이북리더기는 오랜 고민 끝에 오닉스 포크3으로 구입했는데 타사 제품은 호환성이 떨어지고 전자도서관 이용이 불가능해 결국 포크3으로 안착하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초기 세팅을 마칠 수 있었고 사진은 서울시교육청 전자도서관에서 대출한 피터 스완슨의 『아낌없이 뺏는 사랑』을 펼친 모습.



확진자 10만 명이 피부로 와닿았던 건 친구들 중에도 코로나 걸린 사람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이다. 입국하고 며칠은 공항 근처 숙소에 있다가 2주 정도 친구네 집에서 머물 예정이었는데 친구의 가족들이 확진 판정을 받아서 부랴부랴 다음 숙소를 알아보았다. 급하게 알아본 곳인데 오래된 가구와 인테리어 등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Manor Boutique Hotel in Darlinghurst.



다행히 입국 1일 차, 8일 차에 해야 하는 2회의 RAT는 음성이었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면역력 향상을 위해 약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리하여 급하게 사온 멀티 비타민과 집에 남는 약(?)이 있다며 친구가 전해준 프로폴리스와 오메가3로 가볍게 무장. 다행히 대상포진도 나아져서 슬슬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래서 제 첫 출근룩은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집을 구하고 그래도 한숨 놓았다 싶어 친구네 회사로 놀러 간 날. 오랜만에 친구랑 좋아하는 비빔국수랑 반미 먹고 그리워하던 디저트도 먹으며 행복했던 하루였다. 라떼 아트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쿨한 호주 바리스타처럼 너무 스트레스받고 살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무 같은 딸기를 먹으며 시드니 온 걸 실감했는데 날씨를 보면 내가 지금 시드니가 아니라 영국에 와있는 건가 싶었고 외출할 때 선글라스가 아니라 우산을 챙겨야 한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요, 시드니-



어른이 되어도 일기는 밀리고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건 변함이 없다. 체크아웃 전에 냉장고 털기 신공.



다행히 첫 출근 전 날에 이사를 마칠 수 있었고 친구가 이번에는 이머전시(?) 키트라며 박스를 건네주고 사라졌는데 이것만으로도 스토리지 한 칸이 가득 차버렸다. 예전이라면 부담스러워했을 텐데 이제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잘 갚으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제법 잘 받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보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하는 게 더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고.



이사 다음날, 우당탕탕 첫 출근을 마치고 퇴근길에 올려다본 하늘이 무척 아름다웠다.



출국 날짜를 가능하면 뒤로 미루다 보니 1월 말에 첫 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주에 Australia Day가 껴있었고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날은 머릿속에 맴도는, 해야 할 일 리스트는 잠시 미뤄두고 친구를 만나 잘 먹고 실컷 수다를 떨다 왔더니 에너지가 충전된 기분이 들었다. 잘하려면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니 가끔은 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꾸욱 밟아줘야지,라고 생각했다.



출근 시작과 동시에 한 주가 어찌 지나간 줄 모르게 지나갔는데 어쨌든 시간이 흘러 금요일이 되었고 퇴근길에는 첫 주를 무사히 마무리한 것을 자축하며 타코벨에 가서 타코를 뿌수고 왔다. 오늘의 발견 : 포크 타코가 생각보다 맛있다.




3년 동안 한국에서 지내며 시간적/물리적 거리를 두고 돌아왔더니 여러 관계가 알아서 교통정리되어 있었다. 아주 친했거나 아니면 개인적 친분이 없었던 그룹은 거의 변화가 없지만 오히려 당시엔 친하다고 생각했거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적당한 사람들과의 변화가 가장 컸다.


그래서 멀어진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쉽냐면 그렇다기 보단 내가 어디에 있건 변함없이 가까웠던 사람들, 그리고 3년 동안 떨어져 지내며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은 이들과의 관계가 조금 기대될 뿐이다.




브런치북 표지 이미지 출처 :

월간 매거진 (다시) 시드니 2월호 예고편

왜? 다시? 시드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미스터리 쇼핑기
이번 여름, 비치에 갈 수 있을까?
시드니는 지금 : 오미크론이 휩쓸고 간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