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다시) 시드니 2월호

by Ronald

정신없는 와중에 어찌어찌 2월이 되었고 쉬지 않는 설날을 아쉬워하며 출근했더니 자리에 포츈쿠키가 놓여 있었다. 항상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염두에 두라는, 다소 미스테리한 문장을 설날 아침부터 뽑아 들었고 마침 이사하며 새로 받은 키를 오래전에 사용하던 키링에 다시 끼웠다. 네네, 항상 키는 단디 간수하겠읍니다.



회사 근처에 공원이 있어서 날이 좋은 날이면 점심시간에 공원으로 가서 점심을 먹는다. 아직 요리를 하는 건 부담스러워 샌드위치에 음료, 과일 이렇게 간단히 준비를 해간다. 인근이 주택가이기도 하고 카페도 두어 개 있어서 항상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공원인데 어떤 날은 벤치에 앉아서 먹기도 하고 적당히 기댈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커다란 나무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는 사람, 산책 나온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등등 동일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시간을 소비하는 방법은 다들 제각각이다.



예전에 시드니 놀러 왔던 친구들이 차이나타운에 숙소를 잡았는데 매일 밤 술을 진탕 마시고 아침마다 국숫집에 가서 해장을 한다길래 알게 된 해피 셰프 누들. 오가는 길에 들러서 국수 한 그릇 후루룩 하기 좋다. 한국 여행책에 소개된 집이라 가면 항상 15번 해물 만두 국수(이 메뉴는 한글로도 쓰여있다)를 시킨다. 좋아하던 망원우동을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젠 해피 셰프 누들을 가는 사람이 되었다.



시드니는 내게 무척 친숙한 도시지만 또 너무 오랜만이다 보니 조금 낯설고 어색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거의 한 달 내내 이게 현실이 맞나 싶어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중얼거렸는데 출근 3주 차가 되자 갑자기 모든 게 (예전처럼) 익숙하게 느껴져서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인간의 적응력, 뭘까.


그래서 지난 한 달간 가장 힘든 게 뭐였냐면 당연히, 주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처음엔 집중해서 듣다가도 미팅 시작한 지 30분만 지나면 귀가 저절로 닫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됐는데 닫힌 귀를 의식적으로 다시 열어주는 작업을 매일 여러 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여전히 적응 중이고 계속 어려울 테지만, 어쨌든 업무 시간 중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라 나아질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첫 한 달은 이렇게 회사에서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다 보니 집에 오면 저녁 먹고 기절한 듯 잠 자기 바빴다.



쇼핑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면세점에서 사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 했을 때 떠오른 건 향수였다. 향수 설명을 읽다 보면 항상 추상적인 단어들의 나열을 보고 물음표가 오백 개 정도 찍히다 결국 더더욱 혼돈에 빠지게 되는데 매장 가서 시향 하면 그 모든 설명이 한순간에 요약되는 쾌감이 있다. 구입 전에 궁금했던 브랜드 위주로 시향을 해봤고 그래서 제 선택은요-



일본 여행 가면 돈키호테에서 항상 입욕제 코너를 얼씬거리는 사람인데 이사 온 집에 욕조가 없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아파트 1층에 수영장과 스파, 사우나 같은 시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바쓰의 빈자리를 스파와 수영장이 채워주고 있다.


그래서 요즘 금요일 루틴은 저녁에 스파 하기. 잠 자기 전에 1층으로 내려가서 스파를 두어 번 때린 후, 컨디션이 좋은 날은 수영장도 몇 바퀴 돌다가 올라와서 샤워하고 자는 게 루틴이 되었다. 한주를 무사히 보낸 나에게 주는 작은 휴식과 위로.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는데 눈물을 쏟으며 걸었던 길에 버스가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부터 들어 곧장 벨을 누르고 내려서 아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제 나아졌구나 라는 안도와 함께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에 조금 안심했던 하루.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간 이유는 카이로프랙틱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매번 받을 때마다 나를 극락으로 데려간다.(첫 방문 후, 한 달간 매주 감.) 이사하고 이래저래 적응하느라 삭신이 쑤시자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이 이곳이었고 간 김에 예전에 자주 가던 도서관에 들러서 추억팔이 시간을 보내다 왔다. 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근처 베트남 집에 가서 완탕면 한 그릇을 해치우고 귀가.



"세일하길래 스테이크 고기를 많이 샀는데 저녁 먹으러 오지 않을래?"라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초대에 꽃다발 사서 신나게 친구네로 향한 날. 잘 차려진 한상을 남김없이 해치우고 디저트로 호떡까지 먹고 나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었고.



첫 2주급 받은 기념으로 친구들과 이탈리안 런치. 햇살 좋은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아 친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으니 모처럼 주말을 주말답게 잘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휴가를 다녀온 친구에게 10일간 격리하며 2년 만에 가족들과 보낸 시간에 대해 들었고 그 와중에 부탁한 물품까지 건네받아 너무 고마웠다.


건네받은 물품은 알뜰폰과 향수였는데 알뜰폰은 일반 통신사처럼 바로 개통되는 게 아니라 우체국 웹사이트에서 신청을 하고 유심을 택배로 받고 그 이후에 개통을 하는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했다. 더불어 유심을 받고 난 이후에 개통을 해야 하는데 1시간도 넘게 통화음만 울릴 뿐 통신사와 연결이 되지 않았고 결국 출국 전까지 알뜰폰을 개통하지 못했다.(개통이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고 가능하면 출국 전까지 사용하던 통신사를 이용하고 싶어 출국 전날 개통을 시도했는데 혹시 저 같은 분들이 계시다면 조금 미리 개통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번에 알뜰폰을 개통한 건 매우 잘한 일(=본인인증하다가 스트레스받는 일을 줄여줌)로 꼽고 있다.


그리고 향수는 생각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품목이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몇 개만 일단 챙기고 나머지는 짐으로 부쳐야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도착하고 나서 항공 짐을 부치려고 알아보니 향수는 금지 품목이었고 헷- 그럼 배로 부쳐야지라고 생각했더니 선편도 안된다고 하여 멘붕. 특히 호주는 향수 이외에도 약, 화장품 등등 항공/선편에 따라 금지 품목이 많으니 오시는 분들은 꼭 미리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몇 차례 뜨뜻 미지근한 커피를 받아 든 이후로, 카페 가면 커피를 뜨겁게 해달라고 이야기하는 편인데 카페마다 '뜨겁게'를 표시하는 방식이 달라서 좀 재밌다. 'Hot'이라고 정직하게 쓰는 카페도 있고 저렇게 느낌표를 마구마구 날리는 곳도 있다. 귀엽지 뭐예요.



예전부터 블로그에 스압 있는 사진 일기 쓰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와 재밌다는 생각이 동시에 오갔는데 지금 이 시간을 무언가로 남겨보는 건 좀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SNS보다 역시 블로그 형태가 좋을 것 같아 <월간 (다시) 시드니 매거진>을 발행해보기로 했다.


핸드폰에는 1월 사진첩을 띄워놓고 노트북에는 SNS 페이지를 띄워놓은 채 열심히 조각을 모았고 흩어져 있는 낱말들을 한데 모아 이리저리 맞춰보며 첫 매거진을 발행했다.



베프의 결혼식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고 옆에서 괜히 덩달아 마음만 바쁜 와중에 메이크업 리허설이 있는 날이라 친구네 집으로 구경을 갔다. 약 2년 전에 약혼한 친구의 결혼식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단 사실이 믿기지 않고.



금요일, 친구랑 좋아하는 만두집에 갔다. 브런치로 먹는 얌차도 좋아하지만 이 집의 팬 프라이드 덤플링은 육즙이 가득하고 만두피도 도톰, 쫀쫀하여 끊임없이 들어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구운 만두만 먹고 오긴 아쉬우니깐 가면 항상 샤오롱바오도 시키고 청경채도 한 접시 시켜서 같이 먹곤 한다.


맥주를 남겨도 1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나)과 맥주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친구)이 만났고 그날도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맥주를 절반 정도 마시다가 포기하고 콜라로 갈아탔고 남은 맥주는 (늘 그렇듯) 친구의 뱃속으로-



호주 파워볼 당첨 금액이 120M이란 말에 복권을 샀는데 겨우 10불어치 복권 샀다는 말에 마치 벌써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금액을 슬쩍 이야기하며 갑자기 잘해주는 친구들 때문에 좀 웃었다. 자, 이제 당첨만 되면 됩니다(?)



1월에 왔을 때만 해도 여름치곤 날씨가 조금 이상하네? 했는데 2월이 되어도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와중에 웬일로 주말에 날씨가 좋을 것 같아 주중 내내 비가 안 오길 기도했고 그 바람이 이루어져 이번 여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치에 다녀올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남다른 준비성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게 드디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면세점에서 사 온 스노클 기어를 한 달 만에 개시했단 말. 그렇다고 처음부터 스노클 기어를 사 가겠어! 한 건 아니고 다들 뭘 사가나 궁금해서 인기품목을 보다가 어랏, 면세점에서 스노클 기어도 판단 말이야? 그럼 사가야지 하며 줍줍 했습니다.



리셉션에서 이메일이 왔길래 '뭐지... '하고 반사적으로 클릭했다가 순식간에 Awwwww 표정 돼버림. 다음날, 예정대로 웬디가 사무실에 방문을 해주셨는데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냥 우러따. 잠깐 안고 있는데 각 부서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고영을 구경하러 왔고 그래서 다들 일을 못 함. 들리는 소문으론 꽤 많은 사람들이 지원서를 넣었다는데 따뜻하고 잘 보살펴 줄 수 있는 집으로 입양 갔길.



드디어 우당탕탕 1차 짐이 도착. 러기지 2개는 (역시나)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결국 자주 쓰는 것들은 일단 항공으로, 그 정도로 급하진 않지만 없으면 불편한 것들과 겨울 옷, 이불은 선편으로 부치기로 했다. 처음엔 이 참에 새로 다 사는 것도 괜찮겠다 했는데 이왕 사는 거면 또 마음에 드는 걸 사야 하고 그러면 하나하나 마음에 드는 걸 찾아야 하는데, 이게 엄청난 시간과 노동이 드는 일이었고 온갖 것들을 사다 보면 수억(?) 깨지겠다 싶어 그냥 쓰던 것 그대로 짐으로 받기로 했다. 집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이 도착하니 휑하던 방에 뭔가 조금 사람 사는 냄새가 더해졌다.



2월 25일(금)부터 시드니는 대중교통과 병원을 제외하면 마스크 착용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니게 되었다. 시드니의 코로나 피크는 (최근 한국이 그런 것처럼) 오미크론이 유행했던 1월이었고 정점을 지나 확진자가 줄어들자 규제를 완화하기로 한 것.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그동안 마스크에 지쳐있던 사람들은 다 함께 박수를 쳤고 금요일에 출근하니 회사에 마스크 안 쓴 사람이 많아서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한 가지 신기했던 건, 호주로 입국할 때와 회사(입사 전에 백신 증명서를 요구함)를 제외하면 백신 증명서를 제시할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 처음엔 한국처럼 음식점 같은 곳에 들어갈 때마다 백신증명서를 보여줘야 하는 줄 알고 여권과 종이 영문 증명서를 챙겨서 다녔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자 자연스레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작년에 『Crying in H mart』출간 소식에 부랴부랴 원서를 구입했는데 역시 내게 원서를 읽는 건 여전히 영어 공부처럼 느껴졌고 다른 재밌는 한국 책들을 읽느라 바빠 결국 완독 하지 못했는데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번역서가 나왔다는 소식을 SNS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주말에 신간 읽을 생각에 조금 설렜고 마침 이북도 동시 출간되어 처음으로 이북을 구입해봤다.


예상은 했지만 도서관에서 읽다가 난데없이 울참 챌린지를 하게 되었다. 이민 1.5세대인 미셸 자우너와는 입장이 또 다르긴 하지만 아시안 룩킹이라는 점과 한국 엄마라는 교집합으로 인해 그녀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식구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보낸 수많은 시간과, 그 와중에 알게 모르게 피어나는 이야기들, 마치 사진처럼 머릿속에 깊게 박혀버린 일상의 어느 순간 등등 한국 음식을 둘러싼 가족 이야기에는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가족이란 단어와는 별개로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란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생겨났을까.



예전 직장 동료를 만나 얌차 브런치를 먹은 날. 3년이란 시간이 짧지 않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 사업을 시작한 친구, 결혼을 한 친구, 아이가 생긴 친구, 집을 산 친구, 약혼을 한 친구, 대학원을 간 친구, 이직을 한 친구 등등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다들 씩씩하게 제 갈길 가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힘을 내야겠단 생각을 했다. 좋은 영향을 주는 친구들을 곁에 두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지.



시드니 오는 게 확정되고 나서 작년 말에 부재자 신고를 했다. 투표를 하기 위해 거리가 제법 먼 시티까지 아이들과 함께 나온 친구네 가족과 함께 총영사관에 가서 투표를 마쳤다.



시티 나간 김에 더 그라운드에서 원두를 사 왔다. 커피빈 사러 왔다니깐 스태프가 필터용 원두 한 가지와 우유 베이스로 마시기 좋은 원두 두 종류가 있다고 해서 좀 신선했다. 왜냐하면 산미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커피를 내리는 방식에 따른 접근 방식이라서.



드립을 마시기 시작한 이후에 머신으로 내린 것보다 핸드 드립의 깔끔한 맛을 좋아하게 되어서 회사에 드립 커피를 가져가는데 아침에 핸드 드립을 내려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최고 부지런쟁이라는 칭호를 획득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그래서 이번에는 완전히 살러 온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깐 멈칫했다가 일단은 다시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서 왔다고 대답했다.


태어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고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니 이제는 뭐 하나 섣불리 장담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계획이 없다기 보단 매사에 너무 낙관하지 않으며 변화하는 상황에 그때그때 잘 대처하고 그러다가 좋은 순간이 찾아오면 그 상태를 온전히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3년에 그래서 호주에서 얼마나 오래 있을 계획이냐는 면접 질문에 "평생...?"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월간 매거진 (다시) 시드니 3월호 예고편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하며 생각한 것들
내가 좋아하는 일 vs 내가 하고 있는 일
요즘 뭐 먹고 지내?
시드니는 지금 : 홍수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