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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Apr 07. 2024

스무 시간을 잔 날의 기록

얼마 전에는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그리고 많이 아팠다.


한국에서 3주를 보내고 회사로 복귀한 첫 주였다. 목요일에 저녁을 먹고 속이 조금 더부룩하다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하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런데 새벽부터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졌다.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새벽에 강제로 몇 차례를 깬 후 불을 켜고 약을 삼키면서 괜찮아지길 바라며 다시 누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금요일 아침에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몸이 무거워져서 몇 발자국 걸어가면 닿는 부엌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회사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 출근은 할 수 있을까? 가 걱정되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 곧바로 헤드에게 식 리브를 쓰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목요일 아침에는 빨리 금요일, 그리고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고 조금 설레어했고 마침 그날 예정되어 있던 미팅도 그럭저럭 마친 터라 퇴근길에 얼마나 마음이 가벼웠는지 모른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외식이라도 할까 하다가 깔끔한 집밥이 먹고 싶어서 퇴근길에 한인 마트에 들러 두부를 사다가 노릇노릇하게 부쳐 먹었다. 주말에는 실컷 늦잠도 자고 휴가 동안 쌓인 엄청난 양의 사진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일기도 써야지 하면서. 그런데 주말을 코앞에 두고 이렇게 아플 줄이야.


불행 중 다행은 언젠가 구비해 둔 비상약과 잣죽이었다. 아플 때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보험처럼 구입해 둔 잣죽이었다. 작년에 감기로 며칠을 앓고 난 후 한인마트에 갔다가 갑자기 잣죽을 하나 집어든 적이 있다. 이렇게 아플 걸 예상했다기보다는 쓸 일이 있으면 (보험처럼) 유용할 테고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그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죽을 먹을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는 뜻이니 어느 쪽이든 괜찮겠지 하고 구입한 잣죽이었다. 포장지 뒷면에 나온 조리 방법대로 물을 붓고 4분 정도 끓이니 정말 잣죽 2인분이 뚝딱 완성되었다. 그렇게 겨우 아침, 점심으로 잣죽을 먹고 누웠다가 다시 잠들었다가 깨었다가 또다시 잠드는 걸 하루종일 반복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하루를 이렇게 흘려보내는 날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저녁 때가 되었고 낮에 받아둔 밀키트를 조리해서 먹는데 무슨 종이를 씹는 것처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을 먹어야 하니 밥 반공기 정도를 억지로 먹었다. 몸이 피로하긴 하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더니 무료해서 넷플릭스라도 볼까 아니면 책이라도 읽을까 하다가 앉아있는 것마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관두기로 했다. 대신 평소에도 자주 듣는 팟캐스트를 틀었다. 누워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역시 팟캐스트 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잠이 든 까닭에 이야기가 조각조각 나뉘어 마치 단편 영화처럼 몇몇 에피소드만 기억으로 남았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어느새 사방이 어두웠다. 블라인드를 올린 채로 잠들었는데 그사이 밤이 깊어져 저 멀리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드르륵.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내렸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무엇을 잘못 먹어서 탈이 난 걸까 생각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며칠 동안 부지런히 집밥만 챙겨 먹었는데.. 아니면 역시 컨디션의 문제였을까. 스트레스나 압박을 받다가 긴장이 풀리는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아팠던 적이 몇 번 있다. 아픔은 마치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낮은 포복 자세로 '괜찮아. 이제 다 지났어.'하고 긴장의 끈을 탁 놓는 순간 방심한 나를 어김없이 덮치곤 했으니까. 억울한 마음이 들지만 이런 때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나를 잘 돌보는 수밖에 없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토요일 아침이었다. 지사제와 진통제를 먹고 전 날 거의 스무 시간을 잔 것 때문일까 놀라울 정도로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원인이 뭐였을까 하루종일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몸이 나아지니 그냥 살다 보면 하루쯤은 그런 날도 있을 수 있지 하고 마음마저 너그러워졌다. 대신 하루에 스무 시간이나 잔 날을 이렇게 일기로 남겨본다. 인간이 하루에 얼마나 많이 잘 수 있는지, 하루에 얼마나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지, 비상시 잣죽은 얼마나 유용한 아이템인지를 기록으로 남긴 채 이제는 정말 밀린 사진 정리와 여행기를 쓰러 간다. 아참, 이번주에 한인마트에 갈 일이 생기면 장바구니에 죽을 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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