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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Jan 18. 2019

갑자기 교토

시작과 끝이 다른 교토 이야기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법한 <구좌 요약 : 18년 11월>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무심코 클릭한 게 발단이었다. 보낸 이는 케세이 퍼시픽이 소속된 아시아 마일즈로 적립된 마일리지가 곧 소멸될 예정이라는 짧고도 명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곧장 4월 소멸 예정인 마일리지 사용 방법에 대한 링크를 눌렀고 호텔, 렌터카를 지나쳐 마일리지 항공권을 클릭했다. 출발지를 서울로 설정하자 몇 개의 도시가 떠올랐고 내 시선은 간사이라는 글자에서 멈췄다. 2만 마일리지를 사용하기에 선택지는 많지 않았지만 그중에 일본이라면 그리고 교토라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시간 예약이 불가능해 항공권 날짜를 3주일 뒤로 설정하고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화요일이 되어도 항공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녹색창에 '아시아 마일즈 마일리지 항공권'을 입력하고 얼마 안 되는 검색 결과를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 인터넷보다 전화를 하는 게 훨씬 빠르다는 경험자들의 조언에 따라 00700으로 시작하는 15자리가 넘는 숫자를 꾹꾹 눌러 곧바로 통화를 시도했다. 항공사 직원은 어눌하지만 제법 또렷한 한국말로 웹사이트 내용과 달리 서울-오사카 구간은 3만 마일리지가 필요하고 오사카까지 가는 직항이 없어 도쿄에서 환승하는, 총 8시간이 소요되는 루트를 이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일단 전화를 끊었다. 2만 마일리지로 갈 수 있는 도쿄로 목적지를 바꿔야 할까 순간 고민에 빠졌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교토 한복판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교토에 가야만 했다.


결국 나는 20만짜리 오사카 항공권을 구입했다. (부족한 마일리지를 구입하는 것과 그냥 항공권을 구매하는 것의 금액차이가 크지 않았다.) 출발일은 2주 후였다. 나는 평생 즉흥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친숙한 일본이라면, 그리고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지금이라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갑자기, 교토에 갔다.



목적지를 교토로 한 건 사실 얼마 전 SNS에서 본 교토의 풍경이 한몫을 했다. 은각사를 둘러싸고 붉게 물든 단풍과 스마트 커피의 에그 샌드위치, 아랫면이 노릇하게 구워진 교자,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는 교토의 거리를 훔쳐볼 때마다 나는 쿵쿵-하고 마음이 동했다.


첫째날 저녁에는 유자향이 나는 라멘을 처음으로 먹어봤다. 정돈된 인테리어와 깔끔한 육수, 친절하지만 일본인 특유의 기합이 바짝 들어간 직원들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집이었다.



아라시야마 일정이 있던 날은 아침부터 준비를 서둘렀다. 반짝반짝한 강물과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뱃사공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곳이었다. 물론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대나무에 둘러싸였던 하루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부와 검은깨 아이스크림이 사이좋게 반반씩 들어간 모나카를 한 입 베어 물고 노릇노릇한 시바견을 구경했다. 버스를 타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グリル小宝

헤이안 신궁 근처에 위치한 오므라이스 전문집에선 일본 드라마 <런치의 여왕>을 떠올리며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옛날 경양식집 같은 풍경이 정겨운 곳이었다. 마음 같아선 튀김 요리도 함께 맛보고 싶었지만 오므라이스의 양이 적지 않았고 맛 또한 좋아 다른 음식을 채울 여력이 없었다.



비록 청수사는 공사 중이었지만 매직 아워에 교토 시내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니넨자까로 올라가 청수사를 보고 산넨자까로 내려오는 코스를 좋아한다. 내려오는 길에는 우동집 오멘에 들러 이른 저녁을 먹었다. 5시, 첫 손님이었다.



자전거 여행에 대한 의욕이 폭발한 나는 자전거를 타고 10km 남짓의 아라시야마를 다녀올까 고민하다가 버스를 탔고(잘 한 결정이었다.) 차안으로 조금 더 가까운 후시미 이나리(5km)를 떠올렸지만 이 또한 시간이 부족해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했다.(잘 한 결정이었다.)


대신 숙소에서 2km 남짓의 은각사를 자전거 타고 다녀왔다. 자전거를 이용하면서 대로와 골목길을 가리지 않고 잘 닦인 일본의 자전거 도로를 감탄했지만 평소 안 타던 자전거가 여행을 갔다고 갑자기 수월해질 리 없었다. 자전거 주차장을 찾고 돌아갈 길을 계산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라시야마와 후시미 이나리가 아닌, 가까운 은각사까지 자전거 타고 다녀온 걸 이번 여행 중 가장 잘한 결정으로 꼽는다. 허덕이는 내 마음도 모른 채 눈치 없는 애플 워치는 첫 바이크 워크아웃을 축하했다.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걸고 서둘러 자전거를 숙소에 반납했다.



처음 해 본 항목에 도예가 추가되었다. 보는 것처럼 쉽지 않아 밥그릇 하나 만드는데 애를 먹었지만 동그란 흙덩어리에 힘을 꾸욱 주어 밥그릇의 형태를 잡고 엄지 손가락을 X자로 포개어 그릇에 두께를 더하고 빼는 15분의 과정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굽고 색을 입히는 과정을 마쳐 어제 배송이 완료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앞으로 2주를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후시미 이나리에서는 토리이에 둘러싸였다. 달빛에 기대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끝없이 토리이가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가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내려오는 내내 여우상과 묘지를 잔뜩 마주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음산한 풍경에 조급했던 마음이 후시미 이나리 입구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가라앉았다. 가와라마치 산조로 돌아와 네기야끼를 먹으며 교토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러니깐 이건 마일리지로 시작해 마일리지 못 쓰고 온 이야기, 스마트 커피의 에그 샌드위치와 차오차오 교자 대신 다른 것만 잔뜩 먹고 돌아온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다. 간사이 공항으로 들어가 한 손에는 도쿄 바나나, 다른 한 손엔 후쿠오카의 명물 히요코를 들고 나오는 시작과 끝이 다른,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교토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러분, 갑자기 여행하면 이렇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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