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한 주 더 쓸걸 하는 뒤늦은 후회

서울 휴가 두 번째

by Ronald
@room5 roastworks

커피가게 동경과 함께 리스트에 있던 카페를 방문하기 위해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입소문을 탄 까닭인지 약간 애매한 시간에 갔는데도 제법 손님이 있었다. 예정대로 라떼 한 잔 주문하고 잠깐 앉아있다가 왔는데 라떼아트와 테이블의 마블링 패턴이 잘 어우러지는 곳이었다.


여행 가서 하나의 키워드만 가지고 식당이나 카페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광기를 동경했으나 흉내 내는 것마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좋아하는 블로거 한 분이 한국 휴가 갈 때마다 국밥, 평냉, 커피 이런 식으로 한 놈만 패는 여행기를 올려주시곤 해서 한번 따라 해볼까 했으나 그걸 실행으로 옮기기에 나으 욕망은 너무나도 드글드글하고 사방으로 뻗어있다는 사실만 깨닫게 되었다. 리스트를 추리는 게 쉽지 않았고 그걸 일정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일은 더욱 난이도가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한미새일지도

엄마랑 안국역에서 만나서 솥밥집으로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가게 앞에 안내문 같은 게 붙어있었다. 설마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부 수리 공사로 딱 하루 휴점을 한다고 써있었다. 평소처럼 미리 예약 전화라도 했으면 헛걸음을 안 했을 텐데 평일이니까 괜찮겠지 하고 안심했던 게 이렇게 휴점 어택으로 돌아왔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저녁에 가기로 한 명동교자로 발걸음을 돌렸다. 엄마는 명동교자의 부들부들한 칼국수면을 굉장히 좋아하시는데 이모들이랑 가끔 명동 와서 바람도 쐬고 명동교자도 들르시라 이야기했지만 그렇게는 안 오게 된다며 꼭 내가 휴가 오면 명동교자에 가자고 하신다. 하지만 명동교자? 저도 좋아하기 때무네 밥까지 추가해서 야무지게 먹고 왔다.


2호선이든 1호선이든 한강을 건널 때면 하던 걸 멈추고 어김없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게 된다. 지하철에선 주로 핸드폰을 쳐다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고개를 들게 되는 풍경이란 건 아무래도 좀 좋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한미새 하겠습니다.



도둑 맞은 집중력도 돌아오게 하는 영화 [국보]

다음날에는 오랜만에 아트나인 가서 영화 [국보]를 봤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무려 러닝타임 3시간짜리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게 되는 경험은 역시 좀 귀하달까. 대사 하나라도 놓칠까 스크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동시에 자막을 부지런히 훑고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들. 이런 영화를 만나면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보게 된다.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내용과는 별개로 감독의 배경과 함께 영화를 디아스포라적으로 해석한 리뷰가 좋았다. 새해 첫 영화로 손색이 없는 영화였다.



한국 휴가 가면 익숙한 곳과 새로운 곳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가려고 노력한다. 새로운 맛보다 아는 맛이 가장 맛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곳을 게으르게 탐색하고 오면 휴가 후에 왠지 모를 지루함과 아쉬움이 남더라. 그래서 궁금한 가게가 생기면 부지런히 북마크 해두고 동선에 걸리는 곳들을 찾는다. 그리하여 이날은 늘 가던 망원우동 대신 최강금을 다녀왔다.


옛날 경양식 스타일의 돈까스도, 두꺼운 카츠에 양배추를 산처럼 쌓아주는 일본식 돈카츠도 좋아하는데 최강금은 후자에 속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한식이 가미된. 늘 그렇듯 등심으로 주문했는데 미소시루 대신 시래기 된장국이라든지 들기름, 복분자 드레싱, 오미자 차 등으로 한국적인 느낌을 섞은 게 신선했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지 좀 됐는데 한국에서는 (호주에 비해) 괜찮은 돈까스집이나 라멘집이 많으니 이렇게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키버포 들러서 위시 리스트에 있던 동전지갑이랑 백팩을 구입했다. 동전지갑 외부에 포켓이 있길래 처음엔 용도를 몰랐는데 교통카드를 넣고 다니니 빠지지도 않고 번거롭게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엄마가 사용하는 지갑형 폰케이스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백팩도 무척 가볍고 수납이 실용적으로 잘 나뉘어져 있어서 요즘 둘 다 잘 사용하고 있다.



언제든 급조할 수 있는 최고의 책갈피

커피는 연희동으로 이동해서 매뉴팩트. 플랫 화이트를 시키고 한쪽에 동떨어져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작은 규모의 공간인데 너무 시끄럽지 않게 일행과 이야기를 하거나 가져온 책을 읽는 사람들이 너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머물고 떠나면 금세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는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휴가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슬퍼졌다. 휴가 한 주 더 쓸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애니브 케이크가 궁금했으나 하필 휴점일이었고 커피가게 동경 가서 원두 사왔다. 샘플로 받은 약배전 원두는 너무나도 취향이었는데 디카프 원두는 아쉬웠다. 디카프 원두는 항상 100점이 아니라 90점이 만점 같은 느낌인데 그래서 디카프 원두가 맛있는 곳은 일반 원두도 무조건 맛있다는 믿음이 있다. 한국은 아직 디카프 옵션은 덜 대중화되어서 그런지 카페 평균치가 높아진 것에 비해 디카프 원두는 맛의 격차가 크다는 인상을 준다.



지난번에 틸다님 픽, 진영면옥이 너무 좋았어서 이번에는 같은 친구랑 성산왕갈비를 방문했다. 퇴근하고 오는 친구랑 가게에서 바로 만나기로 했는데 식당이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둘 다 여기가 맞나 하면서 조금 헤매다가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양념이 아닌 돼지 생갈비는 오랜만이었는데 반찬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가게 분위기도 그렇고 왠지 옛날 생각이 나는 그런 맛이었다.


이후에는 술집 아니고 카페인데 오후 5시부터 8시까지는 브레이크 타임이 있는 조금 독특한 영업시간으로 운영되는 곳을 방문했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홀린 듯 시음을 했는데 원두 옆에 1.7, 2.1 이런 식으로 써있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알고 보니 이게 드립 커피 한 잔의 가격이었다. 홀린 듯 결제를 하고 자리에 앉고 나서야 어..? 4만원??? 하면서 친구랑 약간 어리둥절 모먼트를 가졌다. 게이샤를 고른 친구는 네 덕분에 인생 제일 비싼 커피를 마셔본다고 했는데 향도 맛도 확실히 차별화되긴 했지만 공간이 주는 만족감이 적어서 다음에 또 갈래 라고 물으면 아무래도 글쎄요 하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북으로 동으로 동선이 큰 날이었다. 오프라인 신라 면세점에서만 쓸 수 있는 포인트가 있었는데 만료가 코앞으로 다가와서 포인트를 털기 위해 오전부터 장충동으로 향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좋아하는 오쏘몰이랑 화장품으로 후딱 포인트를 털고 안국으로 향했다. 오래전에 받은 선불권이었는데 야무지게 다 쓰고 나니 방학 숙제를 마친 것처럼 뿌듯하고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못 먹은 솥밥을 먹기 위해 연어처럼 안국으로 돌아오다

많은 솥밥집을 다녀봤지만 이 집 만한 곳이 없다. 전복 솥밥을 시켜 먹었는데 쯔께모노 사이에 껴있던 다시마 조각이 너무 맛있었다. 나중에 흑백요리사2에 나온 최강록 셰프의 마지막 요리에 올라가 있던 다시마도 이런 맛이었을까?



이라선 책방 들러서 샘 유킬리스의 파본 사진집도 교환했다. 셀프 생일 선물로 생일 먼쓰인 9월이 되자마자 주문을 하여 한국 휴가 가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사진집을 받았건만..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서 받은 사진집이 파본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책방에 문의하고 상황을 설명한 후에 직접 매장으로 가서 교환하기로 했다. 새 사진집은 파본 없나 그 자리에서 꼼꼼히 확인했고 이라선이 통의동에서 안국으로 이사를 한 후에 처음 방문한 거라 새로운 공간을 좀 둘러봤다.



발렁스 왔는데 이거 혹시 몰래 카메라인가요?

몽블랑 사랑단은 발렁스에서 시즌 상관없이 몽블랑을 판매한다는 소식에 춤을 추며 방문. 그런데 한껏 기대를 품고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얼굴이 흑빛으로 변하고 말았는데 몽블랑이라고 써진 쇼케이스 자리가 너무 휑했기 때문이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안타깝게도 몽블랑은 품절되었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잠시 주문대 앞에 서서 깊생 타임을 가져야만 했다.


발렁스를 다시 방문할 시간은 없어서 결국 창가 자리에 앉아서 슬픈 얼굴로 피스타시에를 먹는 사람이 되었다. 품절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다른 테이블을 한번 둘러봤는데 다른 테이블에 있는 몽블랑을 보고 조금 슬펐다는 이야기. 몽블랑의 빈자리, 몽블랑의 슬픔, 나만 없어 몽블랑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피스타시에는 깜짝 놀라게 맛있었다. 몽블랑 포함 발렁스의 다른 디저트들도 궁금해서 필시 재방문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고요.



서울 중심부에서 할 일을 마치고 치과를 방문하기 위해 성남으로 향했다. 타지에 살면서 한국에 대한 결핍 상태로 오래 살았기 때문인지 이동거리나 소요 시간에 대해서는 조금 관대한 편이다. 그러니까 집 앞 편의점은커녕 먹고 싶은 국밥을 먹으려면 차를 타고 40분을 가야 하고 티브이에 나온 성심당을 보다가 한국 빵집을 가려면 트레인으로 1시간, 한국에서 필요한 물품을 받으려면 항공 택배로 받아도 최소 일주일은 걸리는 나라에 살다 보니 어떤 걸 하기 위한 과정의 번거로움 보다는 목적을 이루는 것 자체가 중요해졌다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 호주에서 한국 오는 +11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번거롭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치우고 가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지금 안 하면 +11시간' 조건이 붙는 걸 생각하면 시간을 어떻게든 쪼개서 뭐든 능히 해내게 된다. 그리하여 치과 미션도 무사히 컴플리트. 저녁 약속을 위해 다시 강남으로 향했고 살짝 시간이 남아서 블루보틀에 잠깐 들렀다.



동태탕마저 친구를 그냥 두지 않았다

나의 잼얘 친구 I를 만난 날이었다. 예전에는 친구랑 만나면 근황 업데이트 같은 것들을 하면서 요즘 뭐가 재밌는지,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이나 영화는 무엇인지 같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작년에는 컨텐츠의 소비도 감흥도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실은 회사와 삶에 치여 친구도 나도 그럴만한 심적 에너지가 없었다는 공통점을 깨닫고 웃픈 대화를 이어나갔다.



친구의 알바 일기. 조금 이르지만 올해의 일기상 드립니다/

이제는 삶의 막막함, 중년의 위기 같은 것들도 대화 주제가 되곤 하는데 최근 베쓰 푸틴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친구의 알바 체험기를 정말 재밌게 들었다. 작년에 들었던 소설 수업을 떠올리며 나는 퇴근하면 저녁 차려먹고 넷플릭스 볼 에너지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일단 결제를 해놓고 나니까 어떻게 단편 소설 한 편을 쓰게 되더라고요? 했는데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요일에는 글방 숙제를 제출하는 친구는 머리를 쓰는 일, 몸을 쓰는 일로 나누니까 또 의외로 이게 굴러가더라고요?? 라고 대답을 해서 나는 일단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될까? 했는데 막상 해보면 이게 되네? 하는 인간이란 생명체는 얼마나 놀라운가.


해결책이나 어떤 대답 같은 것들을 기대하기보단 그래도 이런 대화를 할 수 있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건 줄어드는데 싫어하는 건 점점 쓸데없을 정도로 구체적인 리스트가 생겨나서 스스로를 잘 어르고 달래야만 하는 중년이 되었다. 친구와의 다음 토크박스도 기대해 본다.



영화 [세계의 주인] 관람

오전에 병원 갔다가 점심으로 청양 쇼유라멘 먹었다. 흑백요리사2에 나온 칼마카세의 라멘집이었는데 청양 고추의 맛이 강해서 그런지 라멘이라기 보단 약간 잔치국수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맛은 괜찮았다. 이번 휴가에는 계획했던 것보다 병원 방문이 잦았는데 건강검진 하고 병원도 한 바퀴 돌았으니 다음 휴가는 좀 편히 있다가 갈 수 있을 것 같다.



똑띠털은 없고 고집털만 많은 동글귀 방울이

교보 강남 가서 주문한 만화책 픽업해왔다. 교보라플 어플에서 부지런히 모은 포인트로 두 권의 만화책 구입. 캐시워크 하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거겠지. 궁금했던 무뚝뚝 올리브맛을 와그작와그작 먹으며 침대를 등받이 삼아 방바닥에 앉아서 만화책 열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게 바로 휴가지.



저녁 메뉴는 드디어! 마참내! 베이컨포테이토 피자랑 오븐 스파게티. 피자 박스와 봉지를 뚫고 나오는 한국 피자 냄새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위염 때문에 연말 시상식 보면서 피자&치킨 먹는 미션은 실패했지만 포테이토 피자 먹으니까 이걸로 됐다 싶었다. 한국 피자는 한식이다.



겉절이를 너무 좋아해서 엄마가 꼭 출국 하루 전날에 겉절이를 새로 만들어서 싸주시는데 이게 바로 엄마의 사랑 표현 방식이구나 한다. 김치 무게가 적지 않고 이번에는 짐이 많은 관계로 무겁고 부피 나가는 것들은 선편으로 부치기로 했다.


조카 1호가 콜라 캔 세우기 시전해주다

금요일, 마지막 밤에는 오빠가 갈비 사준다길래 수원으로 냉큼 출동했다. 회사일로 낡고 지친 와중에 멀리서 온 동생 챙기겠다고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것에 조금 마음이 따수워졌다. 그리고 성장기의 아이들이란 굉장해서 다음 휴가 때는 조카 1호에게 키를 추월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조금 위기감이 들었다. 분명 꼬꼬마였는데 언제 이렇게 컸담.



집으로 돌아오니 도쿄에 다녀오신 ㅁ님이 보낸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박스를 여니 은은하고 포근한 향이 났는데 안에는 유자향이 나는 녹차와 재밌는 잔이 들어있었다. 재밌는 잔이라고 한 이유는 저 양말 같은 그림이 컬러별로 질감이 각각 다르기 때문인데 꽤 두텁게 덧발라져 있는지 잔을 잡으면 손끝으로 문양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잔을 살살 돌리게 된다. 글과 사진, 그리고 택배에서 전해지는 어떤 한결같은 캐릭터가 느껴져서 좀 재밌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시드니로. 짧은 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 덕분에 한껏 마음을 충전하고 떠난다. 다음 시간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