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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Feb 23. 2019

가보지 못한 나라

쿠바, 트리니다드를 여행하다가

나는 가보고 싶은 나라가 있다. 바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남의 나라. 낯선 온도와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어우러진 공항에 다다랐을 때 Arrival이 아니라 도착이라 쓰인 한글 안내판을 따라가면 입국심사대에서 아리가또고쟈이마쓰- 대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여행. 공항을 빠져나와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는 시내로 들어서면 글씨인지 그림인지 영문 모를 간판을 보고 신기해하는 게 아니라 저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게 어떤 가게인지 2층에 커피라고 또박또박 써진 글씨를 보고 저기에 카페가 있다고 눈치챌 수 있는 그런 나라. 하지만 내가 사는 서울과는 사뭇 다른 정취를 가지고 있는 이국. 해외가 아니라 마치 다른 지방에 온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남의 나라를 여행을 하고 싶다는 희망사항은 쿠바의 트리니다드를 여행하다가 생긴 바람이었다.



기대하고 고대하며 떠난 쿠바 여행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생각만큼 즐겁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미지근한 상태로 나는 막 트리니다드에 도착한 참이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러기지를 찾아 떠나려는데 갑자기 한 외국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혼자 여행 온 거냐고 만약 그렇다면 자신과 함께 다니는 게 어떻겠냐고 다짜고짜 두괄식 대화를 시도한 루시아는 자신을 아르헨티나에서 온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아바나에서 며칠 동안 앵무새처럼 "그라시아스"만 반복하던 차에 만난, 타이밍 좋은 제안이었다. 나는 긍정적인 대답을 이었다. 불쑥 나타난 동행인의 등장으로 지루했던 여행이 조금 흥미진진해질 것 같았다.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영어와 보디랭귀지면 어떻게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럭저럭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고마운 마음은 그 나라의 언어로 전하고 싶다는 생각에 땡큐, 그라시아스, 당케, 메르시와 같은 감사 인사를 익히고 여행의 편의를 위해 "얼마예요?"같은 실용적인 표현 몇 가지를 외워가는 편이었다. 쿠바 여행을 계획하고 슬슬 날짜가 다가오자 불안했던 나는 여행책 부록으로 있던 <쿠바에서 알아두면 유용한 실전 에스파뇰> 페이지를 펼쳐놓고 꾸역꾸역 뒤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조식은 데사이우노, 매운 소스는 피칸테, 아침 인사는 부에노스 디아스라고 마치 시험은 앞둔 여고생처럼 중얼거렸다. 스스로를 벼락치기 타입이라 정의했지만 언어의 장벽은 높았고 특히 발음이 어려운 문장을 따라 할 때면 혀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참고로 나는 아직도 [Despacito]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부르는 게 버겁다.


아르헨티나는 커녕 남미 땅에 제대로 발 한 번 디뎌본 적 없는 나는 부끄럽지만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루시아를 만나고서야 알았다. 그래서 미리 연락해둔 까사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아주머니와 재잘재잘 대화를 이어나가는 루시아를 보고 그녀를 경이롭게 바라봤다. 게다가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인 아닌가, 트리니다드에서 만난 쿠바인들이 아르헨티나 출신인 루시아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물론 그보다는 밝고 사교적인 그녀의 성품이 한몫을 했을 테지만.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루시아를 보며 낯선 땅에서 친숙한 언어로 인사를 하고 의사소통의 어려움 없이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호주에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서서히 한국어를 잃어가고 모국어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때를 기억한다. 급하게 해외배송으로 한국어가 새겨진 책을 주문하고 취향의 팟캐스트를 섭렵해가며 굶주림을 해소시켰다. 한국 영화를 개봉일에 맞춰 관람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족한 한국어가 공급될 때면 잊고 있던 감각들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단어 하나가 주는 느낌이 그렇게도 다르게 다가와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을 글썽이길 반복했다. 결국 우리가 울고 웃는 건 대부분 말 때문 아니던가.



Valle de los Ingenios
독일과 포르투갈에서 온 독일 아주머니 두 분. 이십 대에 쿠바를 여행하고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두 번째 쿠바라고 하셨다.



Playa Ancon

혼자였던 여행은 둘이 되었다 넷이 되기도 했다. 잉헤니오스 계곡과 앙꼰 비치 일정을 소화하고 지친 우리는 저녁을 나가 먹는 대신 까사에서 먹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스페인 커플을 만났다. 테이블 위로 가득 차려진 요리를 사이에 두고 스페인어와 영어가 정신없이 오고 가는 저녁이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에 스페인 커플이 자신들의 익일 일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국립공원이 있는데 거기 끝내주는 계곡이 있다고 너희들도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거리가 꽤 되지만 다 같이 택시를 타면 그리 비싸진 않을 거라는 말에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루시아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Leaping Caburni
국립공원이 근사했다.

한 명의 아르헨티나인, 두 명의 스페인 사람과 하는 국립공원 당일치기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언어 문제가 해결되니 이렇게 여행이 쉽고 편해질 수도 있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영어가 아닌 에스파뇰로 쿠바, 아르헨티나, 스페인, 3국이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어느 나라를 가던 영어를 사용하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 시드니에 사는 수많은 뉴질랜드인, 영국인, 미국인을 보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영어권이 아닌 쿠바에서 실감했다. 아무것도 아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던 얘기를 꺼내서 하지 못한 아쉬움보단 그저 남의 나라가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던 세 친구를 향해 순수하게 일어난, 부러운 감정이었다. 언어에 대한 걱정 없이 다른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나에게 그런 기억은 없다.


내게는 가보지 못한 나라가 있다. 그곳은 저 멀리 위치한 아이슬란드도 아직까지 발 한 번 제대로 디뎌보지 못한 남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도 아니다. 그렇다고 눈 앞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유명한 휴양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곳은 내 상상 속에 있는 남의 나라다. 익숙한 언어로 다른 나라 사람에게 느슨하게 안부를 묻고 마음이 맞는다면 하루 종일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곳.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환경에 따라 생겨난, 그 나라에만 존재하는 생소한 단어가 있고 제주도와 전라도 사투리를 묘하게 섞어놓은 듯 한 다른 억양이 존재하는 곳. 하지만 아마 평생 가보지 못할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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