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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Feb 28. 2019

죄송하지만 아메리카노는 없습니다

호주에서 스타벅스를 일부러 찾아가는 이유

"언니, <국제시장> 보기 전에 우리 스타벅스 갈래요?"


시드니 영화관에선 주기적으로 한국 영화를 개봉했다. 비록 상영하는 영화관은 적었지만 그래도 한국 개봉일과 크게 차이 나지 않게 꽤 여러 편의 영화가 스크린에 오르내렸다. 영화 <택시>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날은 그곳에서 한인 모임이 열리나 싶을 정도로 검은 머리의 동양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드니 영화관에서 Sold out이란 두 글자를 확인하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라 그날도 온갖 여유를 부린 친구와 나는 결국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영화를 관람했다. 코앞에서 송강호 배우의 얼굴이 왔다 갔다 했다. 재작년 시드니 필름 페스티벌 폐막작으론 영화 <옥자>가 상영됐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봉준호 감독이 깜짝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대신 호주의 스타벅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은 예정대로 죠지 스트릿에 위치한 이벤트 시네마에서 관람하기로 했다. 드디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를 관람한다는 사실과 함께 영화관 옆 스타벅스에서 오랜만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생각에 우리는 신이 났다.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드문 것처럼 시드니에서 글로벌 브랜드 스타벅스 매장 찾기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윈야드 역, 하이드 파크, 캐피톨 극장, 파라마타 웨스트필드, 채스우드, 앞서 언급한 죠지 스트릿을 포함시키면 다섯 손가락을 겨우 넘긴다. 언뜻 떠오르는 몇 개의 매장을 줄줄이 읊다 보니 숫자가 꽤 된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사실 저기 언급한 매장이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2019년 2월 현재를 기준으로 호주에서 영업 중인 스타벅스의 점포 수는 총 44개이고 그중에 시드니에 있는 건 18개. 비교를 위해 서울, 그리고 지역을 좁혀 명동에 있는 스타벅스를 한 번 곰곰이 따져보자. 하동관 근처에 하나, 명동 교자 가는 길에도 하나 있고, 어디 보자 영플 맞은편에도 있었던 거 같은데? 오래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명동 안에서만 5개가 족히 넘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스타벅스 중 당장 시야에 들어오는 가까운 점포로 향하는 게 한국이라면 마음먹고 스타벅스를 찾아가야 하는 곳이 바로 호주다.


사실 호주에서 스타벅스가 유독 반가운 이유는 로컬 카페가 지닌 특성 탓이 크다. 로컬 카페엔 아메리카노라는 메뉴가 없다. 게다가 아이스 메뉴를 주문하려고 메뉴판을 아무리 훑어도 도무지 보이지 않아 직원에게 물어보면 "Sorry"로 시작되는 문장을 듣기 십상이다. 아이스 메뉴를 취급하지 않는 카페가 대부분이고 단 하나의 '아이스' 메뉴인 아이스커피를 덜컥 주문했다간 실망감과 배신감에 휩싸이게 될지도 모른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휘핑크림이 들어가는 아이스커피는 우리가 생각하는 얼음 가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라테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아이스 메뉴가 일반적이지 않다 보니 '아이스' 메뉴에 대해 가게마다 다른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일부 카페에선 아이스 메뉴를 시키면 얼음을 곱게 간 블렌디드 형태로 내주기도 한다. 이렇게 아메리카노에서 한 번, 아이스 메뉴에서 또 한 번, 우리의 기대는 보기좋게 무너진다. 그러니 호주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글자를 발견하지 못해도 당황하지 말자. 못 찾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메뉴이니.


© CNBC

사실 스타벅스는 호주에서 오픈한 이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시작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2000년, 첫 점포를 오픈하고 스타벅스는 부지런히, 그리고 공격적으로 매장 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 속도가 소비자들이 브랜드에 대한 로열티를 갖게 되는 속도보다 현저히 빠른 게 문제였다. 성급한 정책으로 오랜 기간 현지인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은 스타벅스는 2000년에서 2007년까지 총 61개의 매장이 문을 (열었다) 닫았고 전체 점포수가 23개까지 줄어드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00년대 중반, 대거 유입된 이탈리아인과 그리스인에 의해 시작된 호주의 커피 문화는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현지화를 완료한 상황이었다. 아메리카노의 왕좌를, 맛이 더 진한 롱 블랙이 차지했고 플랫 화이트로 그들만의 장벽을 두텁게 쌓았다. 스타벅스가 호주에서 지지부진한 이유, 유독 희귀한 이유, 그래서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늘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부재를 실감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가지고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 가장 빨리 적응하는 게 인간이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그만큼 이전의 것을 쉽게 망각하는 것도 우리였다. 나는 어느새 동네 카페를 쉼 없이 드나들며 여름이던 겨울이던 뜨거운 라테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지만 종종 낯설지 않은 로고와 풍경, 그리고 익숙한 커피를 접할 때면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한국에서 밤낮으로 회사 앞에 위치한 스타벅스를 드나들며 쌓은 내적 친밀감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한 12월의 열기는 대단했다. 직원에게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자마자 나는 무서운 속도로 커피를 들이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더위가 한풀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한여름에는 스타벅스의 아아가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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