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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Mar 20. 2019

이를테면 비냘레스에서 말타기

Horseback riding in Vinales

별다른 정보 없이 찾아간 여행지에서 귀가 솔깃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비냘레스 계곡에서 말타기가 그렇다. 여행의 시작점인 아바나에서 일정이 밀려 결국 산타클라라를 포기하고 가까운 비냘레스를 급하게 욱여넣었다. 2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도착한 비냘레스는 규모가 작디작은 마을이었다. 중심가에 이렇다 할 구경거리 하나 없어 30분 정도 걸으면 대략적인 마을 지도가 그려지는 그런 곳. 명동 한복판 같던 떠들썩한 아바나를 떠나 너무 극단적인 소도시에 온 건 아닐까 초조한 마음으로 달력을 펼쳐 남은 일수를 세어보았다. 일정을 앞당겨 내일? 아니면 예정대로 내일모레 떠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아침 말타기(Horseback riding)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건 묵고 있던 까사를 통해서였다. 계획에 없던 일정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큰 볼거리가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주거지역은 꽤 넓게 펼쳐져 있어 새벽부터 묵고 있던 까사로 오토바이를 탄 여자가 픽업을 왔다. 덜덜 거리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시골 풍경을 달렸더니 10분도 안되어 미팅 장소에 도착했다. 기껏해야 최대 수용 인원이 2인 용인 오토바이인지라 여자는 나를 내려주고 몇 차례 참가자들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마침내 5명이 조금 넘는 소규모 그룹이 만들어지자 말을 한 필씩 배정받고 말 타는 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왼쪽, 오른쪽, 스탑은 각각 고삐를 왼쪽, 오른쪽, 뒤로 하면 됐다. 관광객을 태우고 항상 비슷한 코스를 도는 탓인지 말들은 작은 제스처에도 귀신같이 말귀를 잘 알아들었다. 시작하자마자 진흙으로 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만나 행여나 미끄러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베테랑 말들은 안정감 있게 산을 헤쳐나갔다. 불안감이 사그라들자 긴장으로 잔뜩 움츠러 있던 어깨가 비로소 재위치를 찾았다. 평지를 만나 가끔 속도를 낼 때면 차가운 아침 공기가 유독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래 봐야 10킬로 안팎이었지만. 주변에는 산이라고 하기엔 고도가 낮은 뭉툭한 봉우리가 여럿 솟아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비냘레스 계곡을 거닐었다.


말이라는 동물과 이토록 가까이 오래도록 시간을 보낸 것은 처음인지라 투어 내내 말 위에 올라탄 나는 무척이나 설레었다. 왜냐하면 어릴 적에 레고를 가지고 놀 때면 흰 말, 검은 말, 갈색 말, 온갖 말을 가장 열심히 모으던 어린이가 나였기 때문이다. 말의 승차감 아니 승마감은 낙타보다 엉덩이가 아프지도 않았고 높이도 낮아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일단 엉덩이가 덜 아프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흔히 사람들이 코끼리가 작은 일 보는 모습을 폭포수에 비유하곤 하지만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나는 이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폭포수까진 아니지만 분명 수압이 높은 샤워기쯤은 된다는 것을 이 날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쉴 새 없이. 중간중간 목적지에 다다르면 우린 가장 먼저 말이 쉴 수 있는 쉼터에 말을 세워두었는데 그러면 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원하게 소변을 배출해냈다. 쏴아아아아아아- 쏴아아. 우리는 세찬 물소리를 뒤로 한 채 시가 농장을 들르고 동굴을 구경하고 커피 농장을 둘러봤다. 말을 두고 돌아설 때면 항상 쏴- 하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렸다.



시가 농장에선 푸른 연기가 자욱했다. 가이드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시가를 말고 불을 붙여 깊게 한 모금 빤 뒤 설명을 이어나갔다. 테이블 위로 차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는 프랑스 소년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설명이 끝난 뒤에는 시가 한 대를 다 같이 돌려 피웠다. 초등학교 때 친구 집 거실에 아무렇지 않게 놓여있던 88에 불을 붙여 입에 댔다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이후론 담배를 두 번 다시 손에 들지 않았지만 두툼한 시가가 유독 멋스럽고 쿠바에 왔다는 핑계로 나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시가에선 연한 초콜릿 맛이 났다. 애연가 친구들 선물로는 역시 시가를 구입해야겠다고 나는 마음을 굳혔다.


시가 농장도 커피 농장도 동굴을 탐험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역시 이 투어의 백미를 나는 말타기 자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시가향에 정신을 빼앗기기도 하고 커피 농장에서 지루한 설명을 들으며 딴생각을 잔뜩 하기도 했지만 말을 타고 쭉 뻗은 길을 따라갈 때면 그저 신이 나 한편으론 투어가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행위에는 순수한 즐거움이 있었다. 기계가 아닌 살아있는 무언가에 올라타 함께 호흡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는 일, 몇 시간이고 액셀을 내리 밟기보다는 적당한 거리가 되면 멈춰서 말도 나도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는 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사인을 주며 거기가 아니라 반대 방향이라며 행로를 조율해나가는 일 등 세미 오토라는 단어가 걸맞은 온순한 말이었지만 신뢰라는 단어에 엉거주춤하게 기대어 5시간의 투어를 무사히 마쳤다. 뻐근한 허벅지를 부여잡고 말에서 내려와 짧고 반질반질한 털을 몇 차례 쓸어내렸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한 레스토랑을 찾아가는 와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오기 시작했다. 정전으로 불이 꺼진 레스토랑에서 커다란 테이블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정말 식사가 가능한 건지 직원에게 여러 차례 확인했다. 음식이 등장하기까지 비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창문처럼 내 마음도 초조했다. 배를 채운 후에는 돌풍을 뚫고 -물론 돌풍을 뚫은 것은 택시이다- 벽화를 보러 산으로 향했다. 굵은 빗줄기를 맞으며 10여분 동안 벽화를 감상하고 서둘러 택시로 돌아왔다.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한 마을에서 탐험가의 마음으로 지도를 펼치고 돋보기를 댄 채 확대, 다시 한 번 확대 버튼을 부지런히 클릭했다. 그렇게 발견한 작은 점이 모이고 어떤 것들은 가늠했던 것보다 커다란 사이즈로 일정을 채웠다. 구석구석 숨겨진 점들을 잇다 보면 이틀은 거뜬한 루트가 생겨나는 곳. 그래서 보물찾기 하는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는 동네가 비냘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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