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사랑가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을 필두로 아무튼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다. 전작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고 좋아하게 된 김혼비 작가는 언어유희가 대단한 작가다. 이리저리 단어를 꿰어 재치 있게 문장을 엮어나가는 말재간에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혼을 쏙 빼앗겨 낄낄 거리며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른 아침에 카페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메리카노 리필을 부탁하고 추가로 말차 파운드케이크까지 주문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까워 끊어 읽으려다가 이번엔 내키는 대로 쭉 가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처럼 술 한 잔이 동반되면 좋으련만 술은 잘 마시지 못해 똘똘똘 혹은 꼴꼴꼴(소주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 대신 달달한 디저트와 커피로 내 나름의 준비를 마쳤다. 9등분 한 파운드케이크를 한 입 먹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아무튼, 술>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아무튼, 재미가 보장되는 책 아닐까?
술에 이어 나의 리스트는 망원동, 비건, 방콕, 딱따구리로 부지런히 이어졌다. 무엇보다 책 사이즈가 작고 가벼워 들고 다니며 읽기에 부담이 덜 했고 적게는 열 개 안팎에서 많게는 스무 개 정도의 짤막한 글들이 담겨있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기에도 용이했다. 김혼비 작가가 아무튼 시리즈와 만나 더없이 환상의 조화를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작가들도 만만치 않게 재치를 뽐냈고 때론 진지하게 한 주제에 깊이 이야기했다. 술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해당 주제에 대해 얻게 된 잡다한 지식은 덤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아무튼, 문구>가 손에 쥐어졌다. 시리즈 중 여섯 번째로 읽게 된 책이었다.
아무튼 시리즈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라는 주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인지 제목도 중구난방이다. 술처럼 다수가 좋아할, 대중적인 소재도 있지만 스웨터라던가 택시, 문구 같은 생각지도 못한 책이 탄생하기도 한다. 작가들이 내놓은 주제의 스펙트럼에 혀를 내두르다가도 생각하는 것 만으로 좋은 것들이 이렇게나 다양할 수 있다니 한편으론 위로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취향이라니! 내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세상엔 매력적인 것들이 이렇게 많구나,라고. 읽다 보면 관심 밖에 있던 하나의 주제가 내 안으로 들어와 세분화되기도 했고 사실은 하나의 제목으로 엮어져 있지만 그 밑에 딸린 여러 개의 소제목을 보며 한 가지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튼 시리즈를 한 권씩 펼칠 때마다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하나씩 들춰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는 건 좀처럼 어렵다. 태도나 자세, 제스처, 눈빛에서 나도 모르게 진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눈에서 꿀 떨어진다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행동이 아니라 언어라면 어떨까?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말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목소리가 달뜨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자신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두두두- 쉼 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면 이쯤에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그냥 속시원히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로 일축하고 싶을 정도다.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부연설명 없이 다짜고짜 '좋아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가장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튼 시리즈는 이런 '좋아함'에 대해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상세한 일화들을 늘어놓는다. 흥분한 목소리 대신 작가들은 온갖 긍정적인 동사, 형용사, 부사를 나열하며 쉼 없이 떠들고 한 가지의 주제를 둘러싼 에피소드 하나하나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있다. 얼마나 디테일하고 신중하게 이야기하는지 읽고 있다 보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 정도다. <아무튼, 문구>의 저자 김규림 작가는 마치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설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한다. '문구인 (文具人).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암실에 빛 한 줄기가 쨍하고 들어와 온 방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평생을 찾아 헤맨 단 하나의 단어를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조우한 느낌! 아아, 정말이지 나는 이 단어와 단숨에 사랑에 빠져버렸다.'라니, 이건 정말 누가 봐도 사랑가 같은 책이다.
아무튼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이렇게 세 개 출판사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각각의 출판사가 돌아가며 책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는데 재밌는 기획만큼이나 출간되는 시스템도 또한 이색적이다. 현재까지 20여 권을 펴냈고 조만간 <아무튼, 말하기>나 <아무튼, 떡볶이>가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모쪼록 이 유쾌한 릴레이가 앞으로 길고 길게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