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리뷰
코로나19는 결국 도서관 문까지 걸어 잠그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폐쇄된 공간에서 장시간 동안 머무르는 열람실을 폐쇄했고 대출과 반납 서비스만 가능하도록 한정적으로 운영했는데 확진자가 빠른 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이마저도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 코로나19의 국내외 상황은 지금도 무척 빠르고 드라마틱하게 변하고 있으며 3월 셋째 주인 이번 주엔 유럽과 미주에서 확진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한국에선 2월 초부터 공공기관이 제한적으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데 현 상황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시민들이 코로나19와 공존하며 일상적인 삶을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도서관에서 주간 예약 대출 서비스와 택배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4월 7일부터 재개되었습니다. *3월 24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방침에 따라 주간 예약 대출 서비스와 택배 서비스는 중단된 상황이다.)
주간 예약 대출 서비스는 당일 오전에 대출 예약한 도서를 오후에 픽업해가는 서비스로 서울특별시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22개 관에서 3월 초부터 점진적으로 서비스를 시행 중이며 그 외 지역 도서관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을 재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주에는 주간 예약 대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마포 평생학습관을 찾았다. 도서관은 유례없이 한산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반쯤 열린 입구를 비집고 들어가 개인위생에 관한 경고문으로 도배되어 있는 출입문을 지나 책을 픽업하는 장소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책들이 쇼핑백에 담긴 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독서 인구가 현저히 줄었다는 통계치 때문인지 이 날의 풍경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니 다들 이런 서비스가 시작되길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니. 도서관의 소중함이 이토록 부각되는 시기가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한 이유는 오늘 리뷰할 영화가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방식을 무척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다큐는 원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장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 영화에선 다큐에 흔히 등장하는 스토리 텔러인 내레이션도, 등장인물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자막 한 줄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3시간 30분이란 어마어마한 러닝 타임을 자랑하는 이유는 부연 설명 없이 그저 보여주기에 초점을 맞춘 까닭도 있겠지만 이로 인해 이 영화는 보다 사실적인 상황과 생생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장르의 특성상 스토리에 혼을 빼앗기거나 한순간 몰입감이 극도로 높아지는 경험을 하긴 힘들지만 마치 시속 3km로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듯 뉴욕 도서관의 이모저모를 그야말로 낱낱이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 여기 내가 다 준비해놨으니 당신(관객)들은 이를 천천히 음미하고 즐기면 됩니다"라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와이즈먼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123년이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92개의 분점을 운영 중인 뉴욕시 공립 도서관에 대한 12주간의 기록'이란 한 문장은 이 영화의 요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뉴욕시가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123년이란 역사는 어쩌면 그리 길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92개의 분점이 생겨났다는 건 그만큼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닿기 위해 구석구석까지 노력을 뻗쳤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도서관 하면 우리는 흔히 책을 보관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양한 이미지나 영상 자료를 쉽게 찾아보고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카메라는 어떤 직원이 하루 종일 종이 신문을 일일이 디지털 자료로 변환하고 있는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도서관'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업무이거나 설명을 들었을 때 '흠, 생각해보면 그런 일도 가능하긴 하겠네'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
그렇다면 '정보로 소외된 뉴욕 시민들에게도 완전하게 오픈된 공간'이란 설명은 조금 새로울까? 이것도 도서관에 응당 요구되는 기능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자, 그런데 영화에는 이런 씬이 등장한다. 정보로부터 소외된 뉴욕의 빈민층이 스크린 위로 나타나는 장면. 이들에게 직업 교육을 하고 이들의 자녀들에게 방과 후 교육을 하는 것도 분명 도서관의 기능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뉴욕시 도서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와이파이 기계를 대여해준다. 강의나 책, 영상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도 많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인터넷 접속을 통해 무엇보다 빠르고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과 함께 뉴욕 도서관에선 이런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터넷은 당연히 TV, 핸드폰 요금과 묶어서 설치하는 거 아니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 비용이 부담스러운 계층도 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책 <팩트풀니스>에선 소득 수준에 따라 4단계 국가 분류법을 제시한다. 하루에 인당 2달러 남짓을 벌면 1단계, 2~8달러는 2단계, 8~32달러는 3단계, 32달러 이상은 4단계에 속하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아마 99.9% 4단계에 속할 것이다. 세계의 과반수 이상이 중간 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더욱이 최강대국인 미국은 당연히 저소득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미국, 그리고 특히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계급과 인종이 함께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쉽게 마주치기 어려운 상위 1%의 슈퍼 리치부터 홈리스까지 함께하는 도시가 바로 뉴욕이니까. 젠더, 연령, 국적, 장애를 뛰어넘어 도서관은 이들 모두에게 예외 없이, 그리고 차별 없이 열려있는 장소이다.
최근 시시각각 접하게 되는 충격적인 뉴스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다. 대형 마트가 텅 빌 정도로 끝없이 사재기를 하고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으로 경각심 없이 행동하는 민낯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이 지난한 시기가 정말 지나가긴 할까 절망감을 느낀 것도 여러 차례였다. 관람한 지 한참 된 이 영화가 이제야 떠오른 이유는 아마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편성받을까 같은 얄팍한 모습보단 투명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도서관의 발전을 위해 시종일관 소통하고 대화하는 직원들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 그곳은 어느 누구나 호기심과 열정을 채울 수 있는 활짝 열린 장소가 된다. 그래, 현실은 팍팍하지만 사실 인간은 이타적이고 꽤나 괜찮은 존재이며 이런 우리가 모였을 때 상황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3시간 30분 동안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이다. 다짜고짜 도서관에 전화를 걸어 유니콘의 존재 여부를 묻는 전화에도 헛소리라며 그냥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고 "유니콘은 상상의 동물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서의 진지함과 유머러스함이야 말로 현시점에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