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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Mar 27. 2020

호텔을 탐험합니다

책 <여행의 공간> 리뷰 / 우라 가즈야 저

<세상에는 다양한 크기와 맛의 초콜릿이 있습니다>라는 명제 믿게 된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도착해 처음 마트에 들렀을 때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더블 초크, 솔티드 캐러멜, 후르츠&너트, 마카다미아, 오레오 등 그곳에는 커다랗고 난생처음 보는 다양한 맛의 초콜릿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열혈 초콜릿 소비자는 아니었지만 견과류와 바삭바삭한 식감을 좋아하던 나는 한국에서 아몬드볼과 크런키를 먹고 자란 학생이었다. 아몬드볼과 크런키는 각각 34g, 46g 정도로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한 개쯤은 거뜬히 먹을 수 있는 부담 없는 사이즈였다. 그런데 서양의 초콜릿이란 녀석은 일단 두꺼웠고 크기도 압도적으로 컸다. 보통 180g 정도의 중량으로 한국에선 보던 사이즈의 5배 정도 되었다. 한 손에 든 초콜릿이 묵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두껍고 커다란 초콜릿을 한 번에 먹어치우는 건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초콜릿에 그려진 곧은 선을 따라 약간의 힘과 손목 스냅을 이용해 초콜릿을 분할하는 밑 작업이 항상 필요했다. '똑똑'이 아니라 '뚝뚝'하고 꽤 투박한 소리를 내며 초콜릿은 부서졌고 나는 이걸 부엌 찬장에 두고 야금야금 빼먹었다. 보통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Schlosshotel Berlin (Left), Grand Hyatt Seoul (Right)


책 중에서도 한 번에 후루룩 읽어내리기 보단 초콜릿을 나눠 먹듯 하루에 몇 페이지씩 끊어 읽기 좋은 종류의 책이 있다. 우라 가즈야의 <여행의 공간>이 바로 그렇다. 오랜 기간 사보에 연재했던 것들을 한데 모아 엮은 이 책은 글의 호흡이 짧고 앞뒤 내용이 특별히 이어지지도 않아 (잡지도 아닌데) 소파 옆에 두고 조금씩 읽기에 더없이 좋은 책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보여주는 섬세한 스케치와 건축가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호텔의 뒷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묵은 호텔은 하나같이 얼마나 근사한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편지지에 1/50 평면도를 그리는 순서는 이러하다. 우선 방 안의 가로 세로 거리를 레이저 측정기로 측정해 편지지 중앙에 배치한다. 다음으로 침대 폭을 재서 배치, 방과 침대의 관계가 정해지면 다음은 비교적 수월하다. 그 비율을 토대로 요소들을 재면서 연필로 그리고, 중요한 수치들을 적어 넣는다. 도면을 그릴 때 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수채 물감에 녹지 않도록 유성 사인펜 등으로 덧그리고, 연필 선을 지우개로 지운다. 사인펜으로 가구 등을 가늘게 그린 뒤, 천장 높이를 레이저 측정기로 거리를 재면 다음은 색칠이다. 카펫의 무늬를 바닥에 그려 넣고, 가구와 기구에 그림자까지 살리면 한층 분위기가 살아난다. <여행의 공간> p. 72


건축가인 가즈야 씨는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호텔룸에 도착하면 그는 마치 비밀 요원처럼 러기지에서 온갖 정체불명의 장비를 꺼내 호텔방을 구석구석, 그것도 꽤 오랫동안 살펴본다. 그냥 짐 풀고 인증샷 찍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가방에서 나오는 장비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이쯤 되면 머리 위로 물음표가 하나 찍힌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그것보다 이 사람..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그의 수상한 작업이 완료되기까지는 보통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그의 취미는 다름 아닌 게스트룸을 실측하고 그것을 스케치로 남기는 것. 소도시를 여행하다가 우연찮게 들른 싱글룸이라면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만 투 베드룸에 거실, 그리고 4픽스처(욕조와 변기, 세면대는 3픽스처, 여기에 샤워부스가 추가되면 4픽스처라고 부른다.)가 두 개 정도 딸린 스위트룸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얼핏 간단할 것 같은 평면도지만 공간을 실측하고 거기에 색상과 질감과 같은 디테일을 더하다 보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치고 호텔 바(Bar)로 가서 좋아하는 술을 한 잔 마시며 스르르 긴장을 푸는 게 이 호텔 탐험의 마지막 의식이다. 물론 그전에 그린 '작품'을 안 보이는 곳에 잘 넣어두는 게 체크 포인트다. 안 그러면 하우스키퍼에게 닌자로 오인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하우스키퍼에게 '이 그림은 천장에 올라가서 그렸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


가까운 곳을 여행한다면 비행시간이나 시차적응이 그렇게 버겁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이라면 비행시간이 10시간은 족히 걸릴 테고 낮과 밤도 바뀔 터인데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로 널브러지지 않고 매번 의식처럼 이런 작업을 빠짐없이 한다는 건축가의 열정에 (게으른 나로선)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혹은 자료를 늘리기 위해 하룻밤에 호텔 두 곳에 머무르거나 한 호텔에 연이어 묵는다니 말 다 했다 싶다. 이쯤 되면 호텔을 탐험한다, 라는 표현이 아무래도 맞을 것이다.


Hotel Bel-Air - Dorchester Collection © Booking.com

책을 보다가 나는 격렬하게 호텔에 가고 싶어 졌다. 평소보다 한산한 동네 카페에 앉아 글을 쓰다가 잠깐 <여행의 공간>을 펼쳐 든 날이었다. 펼쳐진 페이지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평면도가 그려져 있어 나는 곧장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동시에 실제 모습은 어떨까 싶어 부킹닷컴에 들어가 해당 호텔을 검색해봤다. 호텔은 책에서 본 것과 달리 리뉴얼을 한 상태였지만 아무튼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 친구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우리 저기 가자. (지금 상황으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러기지는 방안에 내던져두고 제일 먼저 야외 수영장으로 향할 것이다. 따스한 햇볕을 쬐며 유리잔 위로 물방울이 맺힌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들이켠 뒤 들고 간 책의 페이지를 게으르게 넘길 것이다. 이때는 아무래도 페이지를 술술 넘길 수 있는 작고 가벼운 한국 초콜릿같은 책이 좋다. 다음 날은 아마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느지막이 조식을 먹을 거라고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우리에겐 호텔 탐험보단 아무래도 이쪽이 더 적성에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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