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친애하는 미스터 최> 리뷰 / 사노 요코 저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수필가로 알려진 사노 요코에게 제가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에세이집 <사는 게 뭐라고> 소개 중 이런 문장을 보고 난 직후였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재규어(자동차)를 구입했다.' 암이 뼈에 전이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재규어를 사는 할머니는 도대체 어떤 할머니일까 라는 호기심이 순식간에 일었습니다. 왜 하고 많은 차 중에 재규어일까, 특이하고 까다로운 그림책 작가로 알려진 그녀의 작품과 취향에 영향을 끼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보낸 노년의 삶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라는 물음표가 잇달아 생겨났습니다. 알고 보니 사노 요코 씨는 시크한 할머니라는 수식어와 함께 욘사마의 팬이라는 반전미도 가지고 계신 분이더군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중략)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젠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시트는 나를 안전히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쓸데없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었고 마음으로부터 신뢰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비록 구입한 지 일주일 만에 재규어는 너덜너덜해지지만(그녀는 주차가 서투른 편인데 집 주차장마저 좁았던 것입니다.) 스스로 운이 좋다고 표현할 정도면 그녀가 인생 막바지에 재규어를 구입해서 얼마나 다행인 줄 모릅니다. 이렇게 다소 독특한 자동차 구매기(?)에 이끌려 구입한 <사는 게 뭐라고>를 읽었던 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그녀의 책은 지금도 책장에 잘 꽂혀있습니다. 물론 너덜너덜하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 말입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하려는 책은 사노 요코의 저서 중 비교적 근간에 속하는 <친애하는 미스터 최>입니다. <친애하는 미스터 최>는 그녀가 베를린 조형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만난 한국인 최정호 씨와 40여 년 간 주고받은 서신을 엮은 에세이집입니다.(후반기에는 편지가 팩스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이국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와 수십 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때로는 바람기도 부지런히 내라며 아무렇지 않게 농을 던지고 '존경'과 '친애' 또는 '사랑'이란 수식어를 아낌없이 사용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제겐 무척이나 근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중 "잘 있어요. 끼니 거르지 마시고 영양도 챙기시고, 그다음은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맺음말은 사노 요코 성격과 특유의 말투가 잘 드러난, 그야말로 다정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프지만 않다면 나머지 것들은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오랜 벗에 대한 지지와 믿음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제 인생을 시시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인생입니다. 미스터 최, 살아 있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친애하는 미스터 최> / 사노 요코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을 읽어나가다가 최근 손으로 편지를 써본 게 언제였더라 곰곰이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보통 이야기를 담는 그릇에 따라 내용의 길이도 말투도, 그리고 농도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편지라는 매체가 특별한 건 비교적 긴 이야기를 마치 대화하듯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보기]를 누를 만큼 기나긴 장문의 카톡이 드문 것처럼 달랑 세 줄짜리 편지를 쓰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공과 시간이 가장 많이 드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당시에는 편지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40년이란 숫자 앞에선 '허허'하고 그저 웃음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내가 40년 동안 무언가를 꾸준히 할 수 있을까'라고 물음을 던지게 되는데 이 질문에 대해서는 향후 주저 없이 대답할 수 무언가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에세이, 특히 한 작가가 쓴 여러 편의 에세이를 계속 찾아본다는 건 무엇보다 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기반으로 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소설이나 그림책이 작가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보여준다면 에세이는 그보단 작가라는 '한 사람'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니까요. 이 책을 읽고 나자 앞으로도 시간이 나거나 혹은 마땅한 읽을거리를 찾지 못했을 때 저는 또다시 '사노 요코'라는 이름을 검색할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오랜만에 익숙한 펜을 손에 쥐고 '친애하는'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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